석굴암 팔부중상은 우리나라 현존 최고(最古)의 팔부중 조상군(造像群)으로 사원의 법당에 계위(階位)에 따른 불교적 판테온을 구성하며 봉안되어 예경(禮敬)의 대상이 되었을 한국 고대의 팔부중 존상군(尊像群)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이다. 그러나 석굴암 팔부중상은 도상적으로 불분명한 존상이 많고, 존상 간에 확연히 구별되는 양식적 복합성으로 인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추측만 제기되어 왔다. 2000년대 이후 발표된 팔부중을 대상으로 한 논문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적극적인 시도로서 도상과 양식뿐만 아니라 전실 공간의 성격 규명, 원형 연구로 이어지는 과정에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본 고찰은 이와 같은 석굴암 팔부중 연구사의 연장선상에서 근년의 실측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도상과 양식에 대해 더욱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팔부중 조성 시기에 관한 새로운 가설을 시도한 것이다.
석굴암 팔부중상 중에서 존상명(尊像名)을 알 수 있는 상은 용, 건달바, 아수라, 야차, 가루라 정도이다. 용상은 머리 위의 용으로 인해 도상적으로는 명료하지만, 착장 방식이 불분명하게 표현된 중국 남북조시대 풍의 복식이나 어색한 손 모양으로 보아 7세기경 유입되어 오랜 세월 동안 모사되고 전이된 화본(畵本)이 저본(底本)이 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 풍의 고식 의장 형식은 팔부중 전체가 유사하지만 양식적으로 팔부중은 3개의 그룹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그룹은 용상(제1상), 건달바상(제2상), 야차상(제6상)으로, 유려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이 그룹은 크기도 220cm 내외로 비슷하며, 바위좌(座)의 크기와 형태 또한 거의 동일하다. 비슷한 두께와 기울기의 종단면 실루엣이나 횡단면 동체의 호형(弧形) 실루엣도 동일한 양상으로, 같은 시기에 함께 조성된 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팔부중상 중에서 본존을 비롯한 석굴암의 나머지 제존상(諸尊像)과 가장 가까운 양식을 보인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상은 제5상으로, 도식적이고 경직되어 있지만 양감 표현이나 부조의 두께는 첫 번째 그룹에 가깝다. 왼손의 단축법 표현은 상의 도식적인 양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원래의 조상이 폐기되고 모각으로 교체된 상으로 추정된다. 더욱 경직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세 번째 그룹이다. 이 그룹의 제3상, 아수라상(제4상), 제7상, 가루라상(제8상) 역시 모각되어 교체된 상으로 여겨진다. 다만 근대에 어색하게 수리된 아수라상의 하반신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부분으로 생각되며 교체되기 이전 원래의 상의 남은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계속적인 모각과 교체는 최초 조성 당시 사용된 석재 암질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래의 팔부중 세트가 조성된 시기는 8세기 말로 추정된다. 같은 수호신 계열에 속한 사천왕상과 비교하면 차이가 두드러져 팔부중은 그보다는 좀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모각으로 보이지만 제5상의 단축법 손 표현은 8세기 통일신라 조각의 천부상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표현이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강역사상 두부와 석가탑 적심석으로 사용된 석굴암 스타일의 판석편은 석굴암이 최초 완공된 이후 변형이 가해졌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자료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