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병』의 1권과 3권이 히포크라테스가 쓴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없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쓰여진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 유명한 의사들은 유명한 조각가나 시인, 교사들처럼 그리스 전역과 소아시아 일대를 순회하며 의료행위를 했다. 『유행병』은 그러한 의사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의사들을 위해 정리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글 자체가 간결하여 대중에게 읽히려고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의사가 병과 환자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단어들을 사용한다. 이는 아직 의학이 세분화되거나 세련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환자를 봐야 하는 의사가 한 눈에 알기 쉽도록 설명하기 위해 그런 서술 방법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 것이다. 이는 대중 앞에서 읊기 위해 글을 지었던 이전의 구전 전통에서 벗어나 웅변가 없이도 내용을 전할 수 있는 글쓰기의 전통으로 이어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글로써 정보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기억된 것을 수정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의사들은 기록된 것을 보면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이 경험을 통해 잘못된 것을 수정하고 없던 것을 추가하면서 지식을 축적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발전이 가능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유행병』은 자칫 병의 증상을 나열한 지루한 글로 보기 쉽지만, 기원전 5세기 글쓰기의 변화와 과학적 의학의 발전을 예고하는 증거로 볼 때 새롭게 읽힐 수 있다. 본고가 오랜만에 다시 시작하는 역사학 고전 읽기의 의미 있는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