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이 소 등에서 피리 부는 모습의 ‘牧笛’ 景은 당나라 때 시와 회화의 주제로 등장하였고 송나라 때 도시민과 관료에게 이상적 전원경이자 유가적 昇平의 상징으로 정착하였으며 선승의 수양 의미로도 확장되었다. 원나라에 들어 牧笛이 八景詩의 一景으로 자리잡혔고 이가 명나라로 이어지면서 昇平의 이미지로 그 의미가 강화되었다. 명대의 회화작품에서 牧笛 景은 昇平의 상징으로 적용되었고, 畫譜에서는 당,송대의 詩를 牧笛 圖像에적용하여 그 회화적 이미지의 전파에 기여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말기부터 국내 지역을 위한 八景詩가 성행하면서 牧笛 景이 해당 장소의 팔경 중 하나로 선정되는 전통이 마련되었는데, 15세기로부터 牧笛은 정치적 태평의 주제로 읊어졌고, 16세기에 들어 유가적 이치의 德治에 기반한 태평과 도덕적 無欲의 즐거움으로 牧笛 景을 의미화하는 팔경시가 증가했으며, 17세기∼18세기 중반에 걸친 牛疫의 고통 속에서 오히려 牧笛 景을 포함하는 팔경시는 폭발적인 양으로 읊어졌고, 그 소제목의 형식도 정착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에 형성된 牧笛의 이미지는 커다란 중국식 물소[水牛] 위에 앉은 목동의 모습이었고, 이는 정선과 심사정의 그림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미지는 조선초기부터의 물소 수입과 중국 회화와 화보의 흡수를 반영하며 지속되었다. 18세기 후반기 우역의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팔경시로 牧笛을 노래하는 詩作 량은 현격하게 줄었고 그림 속 牧笛은 한국 소를 담아내는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또한 한국 소로 기억되는 실경의 牧笛 景은 다시 중국의 문학작품을 그리는 詩意圖 속에 적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