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학[천주학]과 불교 등 이단으로 불린 사유들에 대한 樊巖 蔡濟恭(1720-1799)의 이해와 대처를 검토한 것이다. 나아가 上帝와 神明[尊靈], 天과 인간의 관계, 天性과 人性의 변화에 대한 채제공의 발언을 분석하였다. 서학과 이단에 대한 번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그가 보좌한 국왕 正祖(1752-1800)와 유사하다. 천주학에 대한 번암의 이해가 특이한 것은 그가 상제의 陟降과 監臨을 수긍한 점이다. 채제공은 상제의 감독이 사람으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살도록 추동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보았고, 천당지옥설도 그 연원을 따지면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단에 대한 개방적인 인식과 대응은 불교와 선승들에 대한 번암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불교의 心學, 선사들의 수행법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인정했다. 나아가 유교와 불교의 도가 결국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채제공은 자신의 인생에서 고요할 때의 靜坐 공부, 主靜法으로 스스로 정치적 난관을 헤쳐 나왔음을 회고한다. 심학의 차원에서 채제공은 불교를 굳이 이단으로 간주할 이유가 무엇인지 회의했다. 이런 관점들은 불교를 포함, 이단적 사유들에 대해 채제공이 평상시 견지했던 개방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한편 상제와 천성, 인성에 대한 채제공의 관점은 그가 속한 근기 남인 지식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면모를 보인다. 우선 번암은 성호학파 후예들처럼 인성의 好善惡惡에 주목했고 인성에 기반해서 천도의 嗜善厭惡하는 특징을 해명하였다. 그는 天이 인간을 낳았으므로 인성을 통해 천성을 살필 수 있다고 보았고, 인성이 변화하듯이 천성의 선악에 대한 嗜好도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늘의 嗜善厭惡하는 경향이 일정하지 않다고 본 번암의 발언이 흥미롭다. 다만 채제공은 천도의 福善禍淫, 즉 하늘이 선을 포상하고 악을 징계하는 데는 여전히 일관된 원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상제와 신명에 대한 공경의 태도를 강조하기도 했는데, 성호학파 후배들이 상제의 인격성과 유위성을 노골적으로 강조한 것과는 상이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상제와 신명에게 기도하고 상제의 강림에 대해서도 발언하지만, 상제보다는 인간 자신의 윤리적 태도에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채제공은 정치가로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근기 남인의 사상을 퇴계학맥에 잇는 학술적 계승 작업에도 큰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李滉으로부터 鄭逑, 許穆, 李瀷에 이르는 도의 계보를 천명했는데, 향후에는 이런 도통의식을 뒷받침할 만한 학술적 논거를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