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베트남전을 종식하고 대분란전에서 대규모 전면전으로 관심과 교리가 변화하던 1970년대의 격렬한 교리변화의 중심점인 ‘적극방어’교리의 작성과정을 통해 적극방어 교리의 본질을 연구한다.
1970년대 미육군은 베트남전 후 10여 년간 정체상태였으나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은 현대화로 양과 질 모두 주유럽미군과 NATO동맹국을 압도한다.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미육군은 반군감정, 예산의 감축,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73년 발발한 4차 중동전으로 현대전의 치명성이 미육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 해 창설된 미육군 훈련·교리사령부의 초대사령관인 윌리엄 E. 드퓨이 장군은 그의 전술관을 강하게 반영한 유럽중심의 대규모 전면전 교리의 개발을 시작했다.
육군참모총장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드퓨이는 그의 지지자인 풀 F. 고먼 장군과 돈 A. 스태리 장군의 협업으로 적극방어 교리를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나, 기존 보병병과와 야전부대 등에서 많은 반발을 보였다. 드퓨이는 교리작성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미육군 전력사령부(FORSCOM)와 공동으로 옥토페스트 컨퍼런스를 주최하였고, 독일 육군 및 미공군 전술항공사령부(TAC)와 교리작성 협업을 하여 교리적 합의라는 정치적인 결과를 도출하였다.
교리개발을 통해 최종적으로 FM 100-5 작전 1976년판의 작성을 진행하자 드퓨이는 예하 병과학교, 교리센터들과 작성과 전술관에 차이로 진통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드퓨이의 강한 추진력으로 교범은 결국 작성되었고, 재차 전력사령부(FORSCOM)와 공동으로 오프트콘 컨퍼런스를 주최하여 적극방어 교리를 승인받는다.
교범이 출판되고 배부된 후 육군 내외적으로 전통적인 공세주도, 주도성(initiative)을 중시하는 미육군의 군사사상, 전통보병교리와 충돌하고 많은 반발에 직면한다. 논란의 중심점인 적극방어 교리는 결국 5년 뒤 ‘공지전투’교리로 대체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