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나사 철불좌상은 923년 대경국사 여엄이 제자 융천과 함께 사찰을 창건하면서 오층석탑과 함께 조성했던 노사나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사나사 철불좌상은 1916년 일제강점기 때 조사된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파손된 상태이며 1911년에 일본군이 사찰의 주요 전각들을 불태웠을 때 또한번 훼손되어 불상의 잔편만 남았다는 것이다. 현재 양평 사나사 철불은 일제강점기의 기록과 사진만 전한다. 우선, 사나사의 불교적 성격은 고려 태조의 청으로 보리사에 주석했던 대경국사 여엄의 법맥을 통해 무염의 성주산문(聖住山門)에 속하는 선종 계통의 사찰로 유추하였다. 도상적으로는 8세기 중엽의 경주 석굴암 본존불 형식을 따르면서 양식상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사나사의 주존불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철불의 조성시기는 전 서산 보원사지 철불좌상, 하남 천왕사지 철불, 임실 중기사 철불과 같은 고려 전반의 불상과 양식적으로 비교, 고찰한 결과 사나사가 창건된 923년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사나사 철불 조성의 후원세력에 대해서는 고려 태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추진했던 불교정책과 대경국사 여엄의 후원 및 선종의 교리적 변화 등에 의해 항마촉지인의 철조석가불상로 조성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선종과 교종이 융합되는 불교계의 변화가 중앙집권의 왕권체제로 통합하려는 고려 태조의 불교정책에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양평 사나사 철조석가불상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불교계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성격과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