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중화기독교 평양교회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교회는 1923년 설립 이후 총 네 번의 변혁기를 거치는데, 첫 번째 변혁기인 1928년까지 교회는 소학교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1928년 첫 목사가 부임해 옴과 동시에 학교의 운영권을 화교사회에 넘기고 전도에 집중하는 종교 공동체로 탈바꿈 된다. 이후 교회는 운산광산에 새로운 교회까지 세우는 등 이북지역 화교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전도를 하며 성장해 나갔지만,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발발로 두 번째 변혁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예배당이 파괴되고 신자 대부분이 귀국하는 등 큰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이듬해 부임해 온 자오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는 약 5년간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며 안정된 지역 화교교회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이라는 세 번째 변혁기가 찾아와 이때는 목사도 교인도 대부분 떠나버렸다. 다만 이때도 평양중화교회는 선교사들과 조선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2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변혁기인 1941년의 태평양전쟁 발발 혹은 1945년의 해방 뒤 찾아온 공산화라는 짧은 시기 연이어 발생한 역사적 소용돌이 앞에, 평양중화교회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화교들에게 유난히 힘들었던 ‘일제시대’의 ‘평양’에서 중국교회가 20년 가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한·중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컬한 협력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