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왕 정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된다. 하나는 세손 시절 부친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와 모친 혜경궁과 조부 영조의 돌봄 속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국왕으로 성장한 강한 의지의 인간적인 모습과 다른 하나는 국왕 정조로서 신하들을 훈육시킬 정도로 높은 학문적 수준과 정국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만인이 보다 더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애민을 실천한 개혁군주로의 모습이다.
이 글은 세손 정조가 아니라 국왕 정조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왜 학문에 몰두하고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을 통해 경학과 주자 성리학 체계를 회복하려고 했는지, 그와 같은 학문 몰두의 배경에 자신의 정치적 과제인 탕평을 통한 붕당 간 갈등과 신료들과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전제될 수 있다면, 정조와 신료들 간 긴장은 사실상 공동체의 보전과 좋은 삶이라는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경합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정조가 왜 학문적으로 정학을 정립하는 일을 정치적으로 황극을 정립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는지도 설명될 수 있다. 이를 통해 국왕 정조를 공적 행위자로서 책무를 정확히 인지하고 이행했던 제왕으로 평가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점을 논증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