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는 인간사회의 재난 대처능력을 역사 속에서 고찰하겠다는 문제의식 아래 조선후기 수해 이재민에 대한 정부측의 인식과 대응방식이 한 단계 변화한 것으로 보이는 18세기 후반 정조대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홍수로 인한 농업상의 피해는 일반적인 ‘農政’이나 ‘荒政’의 개념으로 구제되었던 반면, 가옥 피해와 인명 피해와 같은 비농업적인 피해는 ‘恤典’의 개념으로 구제되었다. 기존 연구에서 수해는 주로 ‘荒政’ 차원에서 분석되었으나, 본고는 ‘恤典’에 초점을 두고 분석하였다.
18세기 후반 정조대부터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수해 이재민에 대한 조사-보고-摘奸 방식과 恤典의 시행 기준이 구체화되어 정식으로 자리 잡았고, 이러한 체계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1783년(정조 7) 무렵부터는 ‘漢城府民家頹壓單子’라는 보고형식이 자리 잡혔으며, 부실 조사에 대한 점검도 이루어졌다. 지방에서도 1778년(정조 2) 수해 이재민의 명단을 보고하는 체계가 정립되었고, 1782년에는 보고가 늦어질 것에 대비하여 ‘선 휼전, 후 보고’의 규정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재민 보고는 이들에 대한 恤典을 제대로 시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8세기에 휼전의 대상이 확대되면서 수해 이재민에게도 휼전이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지방에만 휼전이 시행되었지만 1782년 무렵부터는 한성부 이재민에 대해서도 휼전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1787년 무렵부터는 수해로 인한 가옥 피해의 규모를 세분화하여 파악하였고 그에 따라 휼전도 차등적으로 시행하였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휼전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수해 이재민 지원책을 구체화·제도화·명문화한 것은 일시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지속될 수 있는 재해행정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