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초상화인 예진은 숙종대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첫 수혜를 입은 왕자는 연잉군, 즉 영조였다. 영조는 이때의 예진을 때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예진이 점차 정치적으로 특별한 의미와 지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숙종대 이후 영조에 의해 정치적 시각물로 활용되며 점차 격상된 지위를 수립하는 예진의 발전 양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영조는 1714년 〈연잉군 예진〉을 하사받았으며 이는 지지기반이 약했던 영조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이후 경종대에 세제에 등극한 영조는 1724년 다시금 스스로의 예진 도사를 시도하는데, 이를 통해 달라진 자신의 신분을 시각화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임금이 된 영조는 숙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자신의 예진을 끊임없이 언급하고 궁궐 내로 이봉하여 봉심케 한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후손인 사도세자와 정조에게도 예진을 도사할 기회를 허락함으로써 숙종대에 시작된 예진 전통이 후대로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영조는 부왕에 의해 일회적으로 하사된 예진에 특별한 의미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자신과 이후 왕자들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예진은 점차 격상된 지위를 획득하며 조선 후기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