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汝信(1546~1632)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경상도 진주 지역 출신의 문인 학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에 전념한 결과 향시에 24차례 합격하고, 50년 동안 과거를 준비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과거로 인한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산수 유람에 대한 僻이 커지고 仙趣 경향이 심화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억울한 처지에 놓인 지역 인사들의 무죄를 적극적으로 항변하고, 洞約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진주 지역 최초의 사찬 읍지인 『晉陽誌』의 편찬을 주도하는 등 내적인 승화에서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 확장시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진주 지역의 향촌 사회와 백성을 위해 행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지금까지 성여신에 대한 논의는 南冥 曺植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로서의 면모에 치중되었다면, 이 글에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그의 문학에 대한 인식과 실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성여신은 오랜 기간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이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문학 즉 시문에 대한 소양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가 어려서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과 특장이 있었다는 것은 당대인뿐만 아니라 후학들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성여신은 특히 賦를 잘 지어 향시에서 여러 차례 장원을 차지하였던 바, 賦體는 ‘敷陳其事, 敍寫物情’의 특성을 갖는 만큼 그의 글쓰기 특징으로 서술적 표현방식을 들 수 있다. 이는 歐陽脩의 「廬山高」 체제와 韓愈의 「南山詩」의 어법을 차용하여 지은 「遊頭流山詩」에서 극대화되면서 ‘以文爲詩’는 성여신의 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흐름인 동시에 『진양지』의 서술로 연동된다. 이를 통해 성여신의 문학과 기록이 교섭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