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클레피오스는 기원전 291년, 당시 로마를 뒤덮었던 역병에 대처하기 위한 구원투수로서 에피다우루스로부터 로마로 도입되었다. 티베르섬에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한 신전이 마련되었고, 신전이 병원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정기 이후에도 이곳은 계속 병자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남았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로마에서도 아폴로, 살루스와 함께 건강을 주관하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에서 안전과 안녕을 주관하던 신인 살루스는 점차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자 위생, 청결, 건강의 여신인 히기에이아와 동일시되었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의사들도 스스로를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인 아스클레피아데스라 칭했고, 황제의 주치의들을 통해 황제들도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와 연계되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주치의였던 크세노폰에 대한 총애로 그의 출신지이자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로 유명한 코스섬에 대한 공납의 면제를 추진하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순방하는 과정에서 페르가뭄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제우스-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대규모 개축하였다. 카라칼라 황제는 스스로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유받기 위해 페르가뭄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직접 참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로마에서도 일반화된 것은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의 다양한 양상이 나타나는 주화가 로마시에서도 지속적으로 주조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전쟁터에서 부상과 질병에 자주 노출된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도 아스클레피오스는 인기 있는 신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군대 주둔지역에서 발굴된 비문에 자주 나타나는 신격이었고, 이 비문을 세운 이들은 대부분 군대 내의 의료인력들이었다. 비문만이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진 제단과 군 병원 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졌던 성소까지, 군대와 아스클레피오스의 연계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는 다양하게 발견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로마 도입이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주관한 것이었고, 이후의 숭배 역시 일반 대중들만이 아니라 황제 및 군인들과 밀접히 연계된다는 점에서 로마에서의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공동체, 혹은 그에 속한 개인들의 건강이라는 개념에 대해 로마의 국가권력이 어떻게 관심을 표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