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호의 고제 소남 윤동규의 일생, 학문, 그리고 사서학의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소남은 성호 사후 성호학파의 사표로, 어른으로 불린 성호의 고제이다. 그동안 그의 생애와 학문은 소남 자신의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순암 안정복이 작성한 행장과 서간을 통해서 학계에 알려졌다. 그 이유는, 순암 문집이 번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문집이 학계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암의 기록에 의하면 성호의 학문은 소남에게로 전수되고, 가학은 족질인 정산 이병휴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소남의 일생을 「소남윤선생행장초」를 통해 확인해본다. 「소남윤선생행장초」는 순암에 의해서 「소남선생윤공행장」으로 재편되는데, 이 두 가지를 비교ㆍ분석하여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둘째, 이상의 분석을 통해 소남의 학문이 어디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소남은 성호의 학문은 물론, 어려서 접한 『퇴계집』을 통해 퇴계라는 인물과 그의 학문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학문의 정체성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가 정리한 四書學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그는 사서육경에 대한 경설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는 사서를 중심으로 그 학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검토해 볼 것이다.
성호학파는 회의와 자득을 학문방법으로 제시한다. 회의는 선유들의 학설에 의심을 품는 것을 말하며, 자득은 이러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소남이 지은 志와 疑 또한 그러한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성호와 소남을 비롯한 성호학파의 이러한 학문방법은 改新의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여러 학파들이 선유의 말과 행동을 묵수하거나 준수하는 것과는 달리, 성호학파는 새로운 이론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고지신이나 법고창신의 정신을 가장 잘 발휘한 조선후기의 명실상부한 실학파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