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2년에 있었던 마곡사의 큰 화재 후 霽峰堂 體奎의 주도로 사찰 재건이 시작되었다. 1785년부터 사찰의 주전각인 대광보전을 중건하기 시작해 1788년까지 내부에 봉안하는 三壇幀과 벽화를 제작했다. 삼단탱과 벽화는 경기도 양주의 都畫員인 練弘(演弘)을 수화승으로 15명의 화승이 제작했다. 연홍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莊祖)의 능인 현륭원을 세우고 화성을 축조하는 대공역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연홍은 현륭원의 조성 과정을 기록한 『장조현륭원원소도감의궤』(1789)에서 조성소 화원으로 참여했으며, 『화성성역의궤』(1801) 에는 양주 흥국사 화승이며 단청 불사의 책임을 담당한 이로 기록되었다. 17세기 말 충청 지역 화승 能學 등이 대웅전 불화와 단청을 마치고 괘불을 조성한 점으로 보아, 19세기 말 20세기의 상황과는 달리 마곡사의 상징적인 불사에 충청도 화승이 아니라 수원 화성, 현릉원 축조에 참여했던 도화원을 초빙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성된 대광보전의 벽화 역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벽화는 벽체와 포벽 외 내목도리 윗벽, 대량, 창방·평방 등 건물의 내·외부 전체에서 다양하게 확인된다. 대부분은 전각을 중수하던 18세기 후반에 그려졌으나, 일부 19세기 대광보전의 수리 이후 그려진 후불벽 백의관음보살도 등이 전한다. 1788년의 대광보전 재건 시기에 그려진 나한도로 『삼재도회』, 『홍씨선불기종』 등의 판화에서 유래한 도상을 채용했으며, 그 외에도 여래도, 나한도, 화조도, 송학도 등 총 133점에 달하는 다양한 주제가 도해되었다. 이는 충남지역 10개 사찰전각에서 조사된 벽화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수량으로, 재건 불사로 만들어진 벽 화와 후불화가 소실되지 않고 동시에 현존한다는 점에서도 드문 사례이다.
벽화로 그려진 신선도, 철괴선생도, 하마선인도, 한산습득도 등은 불로장생에 대한 염원과 현세기복의 신앙으로 그려지기 시작해 축수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도상을 종교적 성소인 사찰벽화의 소재로 채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는 화승이 불교존상뿐 아니라 산수, 화훼, 화조, 인물화 등 다양한 화제를 수묵과 필선 위주로 그릴 때의 회화적 특징과 변천을 고찰할 수 있는 한국 사찰벽화의 보고(寶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