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가요(哥窯) 자기는 송대(宋代) 절강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 일대에서 제작된 청자의 일종으로 얇고 짙은 태토에 유약을 두텁게 입혀 전면에 강한 빙렬(氷裂)이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본고에서는 송대 이후 중국과 조선, 일본 등지에서 관심을 받았던 가요 자기를 중심으로 조선에서의 수용 과정을 통해 그 의미와 시각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가요 자기는 17세기에 명(明)으로 사행(使行)을 다녀온 허균(許筠, 1569-1618)의 문집에 화기(花器)의 사례로서 일찍이 나타난다. 18세기 이후에는 연행(燕行)을 다녀온 실학파들을 통해 가요 자기에 대한 경험담이나 실물의 소장과 감상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후기 문방청완(文房淸琓)의 풍조 속에서 도자기, 방고동기(倣古銅器) 등은 각종 문방 용품이나 장식품, 화분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현전하는 실물보다는 오히려 도자기의 문양이나 문방책가도(文房冊架圖) 및 기명도(器皿圖) 등 장식화(裝飾畵)에 포함되어 전하는 것이 가장 많다. 동체(胴體)의 빙렬(氷裂)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가요의 속성이 직관적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누구든 그것이 명요(名窯)임에 공감할 수 있었으며,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가요 자기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도자, 품격 있는 소장품, 탈속한 선비의 소유물 등으로 인식된것이다.
조선에서 가요 자기는 장식화 등을 통해 그 이미지가 확산되었는데, 본래 가요 자기가 지닌 유색이나 조형의 실체보다는 짙은 녹색, 청색, 빨강, 분홍과 같은 다채로운 색의 도자기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빙렬문은 강조되었다. 문인의 청아한 심성과 탈속적 기개는 얼음장이 갈라진 것 같은 결기(結己) 있는 무늬와 서로 상응하였다. 나아가 가요와 비슷했던 송대 관요(官窯)에 대한 선망과 이미지마저 호환되면서, 수백 년을 거쳐 중국에서 조선으로 온 가요 자기는 이미지를 통해 청완과 길상의 상징이자 문인의 이상적 서재의 중요한 시각적 키워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