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는 德과 禮가 정치의 근본이었고, 법과 형벌은 정치의 보조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조선후기 正祖 때도 백성의 도덕적 각성을 위한 윤리 교과서, 교훈서들이 활발히 간행되었다. 당시 널리 보급된 교훈서 『五倫行實圖』의 수많은 효자⋅충신⋅열녀들은 지배층의 도덕적 지향과 목표를 보여준다. 한편 국왕과 刑曹의 형사재판을 수록한 『審理錄』과 『秋官志』에는 그들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평가한 행위들이 수록되었다. 범죄사건과 재판 기록을 통해 우리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 앞에 선 인간 군상들과 그들의 욕망을, 그 어떤 자료들보다 생동감 있게 잘 살펴볼 수 있다. 정약용의 『欽欽新書』도 비슷한 기능을 갖는다.
조선후기 성 관련 범죄의 처벌 규정과 판례를 분석한 이 글에서는, 성범죄의 성립 요건과 처벌 규정을 담은 『大典後續錄』, 『受敎輯錄』, 『續大典』 등 법조문을 먼저 살펴본다. 법조문에 담지 못한 다양한 사건과 재판 기록들은 『심리록』⋅『추관지』와 『흠흠신서』를 통해서 분석한다. 성 관련 범죄의 처벌 규정을 살펴보고 재판 운영방식을 분석하는 것은, 당시 법 제정과 운영에 간여했던 지배층, 즉 국왕과 관료들의 내면 심리와 모순된 자의식을 엿보기 위해서다. 영조 때부터 ‘차미(옷깃)를 당기거나 밥상을 마주 대하는[挽裳飯對]’ 수준의 행위를 간통죄 성립의 중요한 요건으로 간주하여 국왕 수교로 성문화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경우, 강간 이수죄 성립 요건으로도 인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옷깃을 잡아당기는 정도의 매우 사소한 행위만으로도 자살했다. ‘만상반대’ 행위가 심각한 간통행위로 간주되었기에, 여성들은 이것이 화간이 아닌 강간임을 하소연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표명하기 위해 최후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간통죄 성립 요건도 반대로 강간 이수죄 성립의 요건은 되지 못했다.
조선후기 남녀가 간통과 강간에 대한 차등적 인식 체계 속에서 살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간통죄를 폐지하고 강간죄에 이목이 집중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和姦과 强奸에 대한 오늘날의 명확한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강간죄를 특수한 성관계가 아닌, 심각한 폭력으로 이해할 인식론적 근거를 갖고 있을까? 간통과 강간의 구별에 민감했던 조선후기 위정자들의 성 인식과 그런 인식의 위력에 직면해 투항하거나 싸웠던 여성들의 체험은, 우리들의 성 인식의 좌표를 되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