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敎科)는 개인·사회·국가의 요구 및 학교 제도의 특성을 반영하여 발견/구성된다. 기본·도구·중핵 교과로서의 ‘국어’ 교과 역시 근대조선·대한제국 시기, 일제강점기, 해방·군정기, 대한민국 시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국어과의 외연과 내포가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교과는 항존성과 가변성의 긴장 위에서 진화하는 역동적인 실체이자 현상이므로, 그 개선을 논하려면 한 세기가 넘는 전통과 한 세대를 앞서 보는 비전을 아우르는 통찰이 있어야 한다.
차기 교육과정은 20세기 말의 7차 교육과정과 21세기 초의 2007·2009·2015 교육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경험 중심→학문 중심→기능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해 온 20세기 교육과정과 달리, 21세기 교육과정은 소통과 맥락, 문화를 강조하는 특성을 보인다. 특히 2015 교육과정은 창의인성을 바탕으로 핵심 역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매체, 연극, 한 권 읽기, 교과 통합 등을 강조하며 개발되었다. 또한, 교수·학습과 평가의 방향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 특성을 보인다. 이런 변화는 2015 교육과정의 성취라 할 만하지만, 여전히 영역 간·선택 과목 간 벽이 높고 12년에 걸친 이수 경로가 모호하며 실질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교과 역량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2015 교육과정의 성취를 발전시키고 한계를 극복하여 국어과교육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어’라는 교과의 개념과 본질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지식정보의 폭발적 증가와 테크놀로지 발달에 따른 사고·의사소통 양상의 변화, 성(性)·세대·지역·종교·인종·학력·부(富)·정치 성향 등 다기화되는 사회 분화로 비롯된 언어문화의 변화, 남북·국제 관계와 학업·직업 환경의 변화에 따른 국어 능력에 대한 요구 변화 등이 맞물리면서 전통적인 국어과교육으로는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어 순혈주의 극복, 세계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한 이해 심화, 국어 활동의 실제성 확보, 매체 언어 수용, 문학 개념 재설정, 정전 텍스트 재구성, 선택 과목 재편, 새로운 도구성 발견과 같은 논점들이 새로이 제기되었다. 국어교육계는 이들 논점에 관해 앞으로 한 세대를 견딜 수 있는 답을 찾아야 한다.
국어 교과 재설계를 위한 작업들은 과거와 미래, 학교 안과 학교 밖, 이론과 실제의 복합적인 타협으로만 가능하다. 이를 ‘국어 교과의 정치학’이라 부를 수 있는바, 이 정치에 간여하는 여러 집단과 담론들이 각기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국어 교과의 개념이 새로이 구성될 터이다. 이때 적용할 원칙은 주체(개인·집단)-언어(음성·문자·매체)-맥락(시간·공간·관계)의 본질과 상호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그 결과가 ‘국어과’라는 교육과정 생태계를 이루며, 이 생태계가 건강하고 활발하게 작동, 발전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국어교육 전문가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