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시대 공문서에 나타난 서명 방식은 크게 ‘착명’과 ‘착압’으로 구분되었다. 기본적으로 착명과 착압은 상하 위계를 전제로 禮의 원리에 따라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공문서에 적용된 서명의 원리는 위계상 하위에서 상위로 보내는 문서에는 착명만 하거나 착명과 착압을 함께 기재하고, 상위에서 하위로 보내는 문서에는 착압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초 관사에서 왕명을 받들어 개인에게 발급한 봉교 양식의 문서(봉교문서)에는 착압이 아니라 착명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시대 공신녹권, 문무관 오품이하 고신, 녹패이다.
문무관 오품이하 고신도 그 연원을 따져보면 전신인 조사문서에는 착압이 사용되었다가 오품이하 고신 제도가 성립되면서 착명으로 바뀐 것이다. 녹패도 기존에는 착압이 사용되었다가 오품이하 고신 제도의 성립 무렵에 착명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현상은 관문서 가운데서도 봉교문서를 여타 관문서와 차별시킴으로써 문서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위상에 변화가 주어진 것은 결과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말 관문서였던 홍패가 조선 개국후 왕지 또는 교지 양식의 왕명문서로 격상된 것은 다분히 왕권이 미치는 범위를 관료 선발에까지 확장시킨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렇듯이 관문서 가운데서도 봉교문서의 서명을 차별화함으로써 왕권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조선초에 들어와 나타난 봉교문서에 사용된 착명의 의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