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정조의 정치철학적 관점을 당시 사대부들의 정치적 입장과 비교하면서 조명한 글이다. 현실군주로서 군도(君道)는 물론이려니와 사도(師道)까지 함께 자임한 정조의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좀 더 분명히 구명하기 위해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소장층 학자들과 제왕학 수업의 주체였던 경연관들의 견해를 비교 고찰했고, 현실 사대부에 대한 정조의 비판적 입장도 함께 살펴보았다. 정조는 당시 노론계 사대부들이 훈고학?고증학? 명청대 패관소품체에 탐닉하고 남인 소장층이 서학과 천주교 등 이단사설에 심취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자신이 사습(士習)과 문풍(文風)을 바로잡아 교정하는 주체가 되고자 했다. 이렇게 사도를 통해 학문적 수장을 자처한 정조는 더 나아가 정치적 일인자로서 군사(君師)의 책무를 함께 주장하게 된다. 정조의 군사론은 영조시대 이래 진행된 정치적 탕평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가능한 것이다. 주자학의 관점에 따르면 총명예지(聰明叡智)를 갖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성[性]을 실현해 누구나 군사가 될 수 있고 인륜도덕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황극(皇極)을 세우는 ‘건극’의 주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책무가 현실적으로 군왕인 본인에게만 맡겨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왕과 사대부 혹은 군신 간의 위계질서를 엄격히 하면서 군왕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수양의 차원에만 머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기존 연구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사대부들의 무위정치론 혹은 재상위임론을 공박하면서 왕권강화를 위한 유위정치의 이념으로 드러났다. 한편 정조의 정치철학을 총결하는 성왕론 혹은 황극 정치론은 결국 그 논리적 토대를 서경 ?홍범?에 대한 해석에서 찾았다. ?홍범? 4장의 ‘오황극(五皇極)’, 10장의 ‘유황작극(惟皇作極)’을 통해 오직 군주만이 황극을 세운다는 이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조도 원리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군사가 되고 황극에 이르는 것은 군왕뿐 아니라 모든 사대부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인격연마와 학문적 고취를 통해 누구라도 이 과업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세습군주로서의 정조는 도덕과 정치 혹은 학문과 정치 사이의 현실적 괴리를 목도하고, 사대부의 자기수양과 왕의 정치권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주자학적 세계관을 인정하면서도 군왕의 고유한 영역을 정립하려 했던 정조의 입장은 노소론계뿐만 아니라 정약용 같은 남인학자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샀다. 정약용 역시 정조의 규장각 설립과 초계문신제를 강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다산은 상서고훈 ?홍범? 해석에서도 ‘오황극’의 군주 자리뿐만 아니라 군주의 정치력을 견제할 만한 ‘천[상제]’의 영역을 함께 강조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절대왕정에 복무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내비췄다. 이처럼 사대부 지식인과 정조의 정치철학적 입장 사이에 드러나 간극을 보여주면서, 18세기 정조시대의 학술 토론들이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역사적 의의를 고찰했다.This paper is intended to examine Jongjo's politico-philosophical viewpoints against Sadaebu(士大夫)'s. Actually he was famous for his acknowledgement of Gundo(君道) and Sado(師道). In order to illuminate politico-philosophical viewpoints we should compare his standpoints with Chogyemunsin(抄啓文臣)'s and Gyongyongwan(經筵官)'s. Occasionally Jongjo expressed his sharp criticism of the heretic behavior of Sadaebu at that time. So he acknowledged the supporter of Gundo and Sado. Historically Jongjo's Gunsalon(君師論), namely his view of king and teacher was inherited from Yongjo's Tangpyongcheak(蕩平策). At that time Sadaebu insisted on Muwijongchi無爲政治, Jongjo should argue the idea of Yuwijongchi有爲政治. In order to contend his political idea, he attached importance on the text of Hongbom(洪範) chapter in Sogyong(書經). Interestingly in many points his strategy was resonant with Jongyagyong(丁若鏞)'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