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文化 간 교류의 각도에서 중한 양국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면 양국 문학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본 논문은 17-18세기 중한 양국 문인간의 교류를 중심으로 중한문인 간의 다문화적인 교류에서 나타난 문화적 공통점과 차이점의 특성을 탐구하여 오해와 충돌을 해소하는 방도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17-18세기에는 중한 문인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조선 문인들은 使行을 통해 중국 문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고 그 과정에 두터운 우정을 맺을 수 있었다. 심지어 대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안동 김상헌(호는 청음, 1570~1652년)과 어양 왕사정 간의 교유와 풍산 홍양호(호는 이계, 1724~1802년)와 기윤 간의 왕래는 그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연암그룹의 홍대용, 박지원 그리고 이덕무 등과 청나라 문인 엄성, 반정균 간에, 청나라 대가인 옹방강과 추사 김정희 간의 교유관계 등도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편폭의 관계로 자세히 논하지 못했고 여기서는 조선 김씨 가문과 홍씨 가문이 청나라 문인들과의 교류현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에 중한 양국의 문인들은 다양한 교류를 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그런데 교류과정에 상대방의 민족성, 역사, 문화 그리고 언어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문화오해 현상도 자주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문화적인 오해는 쌍방의 정상적인 문화교류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 소이연을 따져보면 정치역사적인 원인도 있었지만 언어 소통상의 문제, 그리고 詩歌 창작에 있어서 운의 불일치 등 현실적인 문제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교통과 통신기술이 발달한 오늘에 이르러도 異文化 間의 교류에는 언어, 민족습관 등 방면의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17~18세기에는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이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 원인은 주로 아래와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중한 양국의 비슷한 문화 배경이 양국 문인들이 교류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한 양국은 다 유가 문화권에 속하고 양국의 학자들은 유가 문화에 대해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생관, 문학관, 윤리관 그리고 세계관 등 방면에 다 같은 가치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점은 양국의 문인들이 친해지기 쉽게 했다. 둘째, 양국 문인들은 다 한자를 쓰기 때문에 교류하기가 아주 편했다. 서로 언어가 다르지만 한자를 써서 필담을 할 수 있어서 교류하기가 수월해졌다. 그리고 필담은 그들의 대화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래가는 교류관계를 맺는데 큰 도움이 됐다. 셋째, 한시는 중한 양국 문인들이 교류하는데 매개가 되었다. 중한 양국의 문인들은 다 시를 잘 쓰고 중국에는 옛날부터 ‘시로 친구를 사귄다’라는 전통이 있었다. 양국 문인들의 만남과 교류는 대부분 상대방의 시를 낭독하고 평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시로 교류하는 일은 그들 간의 왕래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넷째, 학술교류는 양국 문인간의 교류의 깊이와 넓이를 향상시켰다. 양국 문인들은 표면적인 예의적인 교류를 넘어서 깊이 있는 학술 탐토, 심지어 비평과 쟁론도 했다. 물론, 이문화간의 교류과정에 상대방 문화에 대한 오해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오해은 대부분 다 교류와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무의식적인 것이고 양국의 학자들은 일찍부터 이것을 의식하여 문화 오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다. 바로 중한 역대 문인들의 이와 같은 노력 때문에 중한 양국 사이에 문화오해로 인한 문화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It’s helpful for correctly learning the nature of literary rel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terms of intercultural communication. The paper focus on the communication between Chinese and Korean scholars on 17th and 18th century to make an investigation on some features showed by East Asian Culture’s intercommunity and diversity in the process of intercultural communication by scholars of the two countries.
This period was a time of literary communication. Some Korean scholars tied up with Chinese or made sincere friendship with them by diplomatic envoy, some even been told for generations. Some typical of these communication as friends for years between Kim Shang-Heon(surname as Chung-Om, 1570-1652) and Wang Shi-Zheng(surname as Yu-Yang), also as Hong Yang-Hao(surname as EGea, 1724-1802) and Ji Jun. Moreover, there are records of scholars in Northern Learning School such as Hong Tae-Yong, Park Ji-Won, Li De-Mao’s spiritually attract with scholars of Qing Dynasty, also there are senior and junior fellows such as Weng Fang-Kang and Kim Jung-Hee. As space is limited, the paper mainly focuses on the communication between Kim and Hong from Korea to the scholars of Qing Dynasty.
There are so many anecdotes in the late Korean literature because Chinese and Korean scholars did multilevel and regular communication. However, that doesn’t mean there are no unharmonious factors. In the process of communication, because of lacking recognition of nationality, history, culture and language, the misunderstanding in culture is common. Directly, the misunderstandings influenced the normal exchange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fact, the reasons are both in the aspect of politics, history and practical congenital factors, such as difficulties in communicating by language and different rhythm in poem writing.
The intercultural communication is still a obstruction in the aspects of language and culture even in modern society with highly developed transportation and telecommunication. However, the scholars could tie up there relations as old family friendship in 17thand18thcentury, and even gave us some dramatic and entertaining stories. The reasons may be as follow: in the first place, the similar cultural background took very important place in the intercultural communication at that time. The scholars got the same understanding for Confucian culture and had the same philosophy, literary concept, ethics and world view, so it’s easy for scholars of the two countries making friends. Secondly, Chinese character did its best contribution as a common communication tools. Although the languages are different, they can communicate by writing, and it’s also convenient for recording what they had talking about. Thirdly, Chinese poetry became the bridge of communication between scholars from the two countries. They all could do poets and Chinese scholars even had the tradition of Meeting Friends through Poetry. Most of acquaintances between the scholars are beginning with reading and commenting the others’ poetry and gradually became an important communication. Fourthly, the interchange deepened the intercultural communication intensively and extensively. The literary exchange between these scholars was not only on the aspect of courtesy contact, but also involved further level academic discussion, or even criticism and argument. Of course, these misunderstandings for the other can not be avoided, but most of them are unconscious because of lacking communicating. Both sides of them convinced of this problem and do their best to avoid the misunderstandings.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re is no culture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because of cultural misundersta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