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政治'라는 두 글자 합성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엽까지의 대표적인 서구 政治體, 즉 영국식 입헌군주정과 미국식 대통령제의 원리를 개화사상가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정치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儒家的 民本主義와는 다른 독특한 면모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한기는 우선 당대의 일반적 유학자들과는 달리 현실 세계를 욕망의 세계로 규정했으며, 民의 欲望과 私情을 정치적 公論의 중요한 토대로 인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 의해 鄕擧里選이라고도 불리는 民願에 기초한 選擧法, 다시 말해 鄕里와 州郡에서 덕망과 재능이 있는 자를 상부로 推薦 혹은 徵벽하는 제도를 구체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民欲 혹은 民願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選擧 과정은 중간 관리들에 대한 黜陟 여부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君長 혹은 人主에 대한 推戴 문제에까지 연관된 것이었다. 최한기는 초기작인 『講官論』에서부터 후기작인 『人政』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통치권자에 대한 民일반의 共戴 혹은 推戴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이 民의 정치 참여에 대한 상당히 진보적 견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統民運化 상에서 君主와 臣僚, 明師 등 지도자 계층만이 지닌 고유한 정치적 역할을 별도로 강조했으며, 衆人들인 民은 人政의 최종 준거가 되는 天地運化氣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정하기도 했다. 『人政』 마지막 권에서 최한기는 본인이 주장한 政體에 대해 萬人治인지 一人治인지 굳이 따지지 말라고 말했지만, 위와 같은 몇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 그의 정치론은 民願을 강조한 萬人治의 원리를 논리적으론 일부 반영하되 소수 爲政者들의 啓導的 역할을 동시에 주장한 혼합형 정치 형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