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古以来, 中国哲学以经典为中心而展开, 经典的解释不仅决定了一个学者的思考系统, 而且决定了一个时代的思维模式, 在中国哲学中经典的解释占据着不可忽视的地位, 许多学者努力从经典中挖掘佐证自己主张的根据. 在支撑中国哲学的很多经典中, 《周易》 被称为 "群经之首", 是承担起中国哲学的一大栋梁, 尽管如此, 《周易》 因为占筮的成分和哲学因素混杂在一起, 所以被认为是最难理解的经典. 因此, 中国哲学史上的许多学者都致力于从 《周易》 中除去占筮的部分并吸收其哲学内涵, 结果导致中国哲学的形成跟 《周易》 的解释产生了不可分割的关系.
汉王朝灭亡以后, 道家和佛教各自在思想界组建了自己的势力, 严重挑战了儒学的权威, 并且当时在儒学内部也存在南北学的分歧, 唐王朝将儒学采纳为官学, 在官方的主导下以儒学为中心统一思想界. 大量在唐代初期活动的儒学者们参与 《五经正义》 的编纂, 对五部经典进行了权威解释, 《五经正义》 作为集体智慧的成果, 解决了儒学内部南北学不一致的问题, 以后 《五经正义》 为唐王朝的发展和繁荣提供了相当大的帮助. 《周易正义》 是 《五经正义》 中之一, 因为编纂时在郑玄和王弼的 《周易》 注释中, 王弼的解释更为卓越, 所以编纂人选择以王弼和韩康伯的 《周易》 注释为底本, 但是他们同时坚持 "先以辅嗣为本", "必以仲尼为宗" 的原则, 试图从儒学的角度理解 《周易》.
《周易正义》 认为宇宙的核心在于变化, 而 《周易》 重视的也是变化, 通过深入理解变化, 得出解释 《周易》 的关键在于 "不可一例求之, 不可一类取之" 的原则, 反对将 《周易》 的解释固定化或者程式化. 《周易正义》 提出了 "不可一例求之, 不可一类取之" 的原则, 明确指出了象数易和义理易各自在解释 《周易》 上的局限性, 《周易正义》 认为以取象为中心兼顾取义, 并由此追求象数易和义理易的合一是解释 《周易》 的最佳方法. 因此, 跟其他四部 《正义》 立足于 "疏不破注" 的解释原则相反, 《周易正义》 根据 "不可一例求之, 不可一类取之" 的原则, 除了王弼和韩康伯的观点以外还参考了许多经典和学者们的想法, 并以此为基础添加了自己独特的见解, 成为了唐代 《周易》 解释的标准.
在宇宙论方面, 《周易正义》 一方面主张王弼和韩康伯重视的 "无" 指的是元气和阴阳二气, 同时具有自然无为的特性, 从而进一步扩展了 "无" 的定义; 另一方面认为 《周易》 的训导都集中在 "有" , 凸显了 "有" 的重要性. 解释 《周易》 的时候, 积极运用体用的范畴, 将部分概念归类于体和用, 《周易正义》 认为体和用都很重要, 但是体比用更根本. 《周易正义》 认为阴阳二气不但是宇宙的根本, 而且是根源, 为了更具体地说明这一观点, 《周易正义》 指出在 《周易》 中出现的乾元和坤元分别指阳气和阴气, 并且阴阳二气能产生万物.
在人事方面, 《周易正义》 认为 《周易》 的卦爻辞跟人事有着密切的关系, 并且在解释 《周易》 的时候使用了一些特定表现来强调这一点. 不仅如此, 《周易正义》 认为圣人和君子制作或者使用 《周易》 的目标都是为了处理人事问题, 表明出重视人事的态度. 《周易正义》 认为依 "礼" 指导百姓生活, 依 "礼" 运营国政是人事的重要内容, 由此推导出贤人的帮助是必要的, 所以培养贤人也是人事上不可或缺的因素.
不仅如此, 《周易正义》 为易学和哲学的发展提供了重要的参考资料, 唐代学者们对 《周易》 的看法都直接受到 《周易正义》 的影响, 完全不能摆脱 《周易正义》 的理论. 在唐代以后, 《周易正义》 仍然发挥其价值, 对宋明理学的诞生也产生了深远影响, 在宋明理学的形成中占据重要地位的人物其理论基本上都以 《周易正义》 为基础. 虽然后代学者对 《周易正义》 的评价大部分是否定的, 他们认为 《周易正义》 选择王弼和韩康伯的 《周易》 注释为底本是问题根源所在, 但这些都只是凭借 《周易正义》 表象所作出的肤浅判断, 没有深入考虑 《周易正义》 的意图和内涵.
예로부터 중국 철학은 경전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으며 경전의 해석은 한 학자의 사고 체계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사유모식을 결정지었는데, 중국 철학에서 경전의 해석은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많은 학자들은 경전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근거를 발굴하고자 노력하였다. 중국 철학을 지탱하는 수많은 경전들 가운데서 주역은 "군경지수" 라고 불리며 중국 철학의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은 점서의 성분과 철학적 요소가 뒤섞인 까닭에 이해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경전으로 분류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 철학사에 등장하는 많은 학자들은 주역 속에서 점서의 부분을 걷어 내고 철학적 내용들을 흡수하는 것에 치력하였는데, 그 결과 중국 철학의 형성은 주역의 해석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한왕조가 멸망한 이후 사상계는 도가와 불교가 각자의 세력을 구축하고 유학의 권위에 도전하였으며 유학 내부에서도 남북학의 갈등이 발생하였는데, 당왕조는 유학을 관학으로 채택하고 관방의 주도 아래 유학을 중심으로 사상계를 통일하였다. 오경정의는 집단지성의 성과물로서 당대 초기 활동 하던 유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오경에 대한 해석을 진행하였는데, 오경정의의 편찬으로부터 유학 내부의 남북학 불일치 문제가 해결 되었으며 이후 오경정의는 당왕조의 발전과 번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주역 정의는 오경정의 가운데 하나로서 주역에 대한 정현과 왕필의 주석 가운데서 왕필의 해석이 뛰어났기 때문에 왕필과 한강백의 주석을 저본으로 삼지만 "先以辅嗣为本", "必以仲尼为宗" 라는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유학의 시각에서 주역을 이해하길 시도하였다.
주역 정의는 우주와 주역이 중시하는 것은 바로 변화이며 변화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로부터 "不可一例求之, 不可一类取之" 라는 원칙이 주역을 해석하는 관건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주역의 해석이 고정화 혹은 격식화되는 것에 반대하였다. 주역정의는 "不可一例求之, 不可一类取之" 라는 원칙을 제기함으로써 상수역과 의리역이 주역을 해석하는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였는데, 주역정의는 취상을 중심으로 취의를 겸하고 이로부터 상수역과 의리역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주역을 해석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이해하였다. 이 때문에 다른 네 부의 정의가 "소불파주" 에 입각하여 경전을 해석하는 것과는 반대로 주역정의는 "不可一例求之, 不可一类取之" 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왕필과 한강백의 관점 이외에도 수많은 경전들과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고 이를 기초로 자신의 독특한 해석를 덧붙였으며 당대 주역 해석의 표준이 되었다.
우주론의 측면에서 주역정의는 한편으로 왕필과 한강백의 중시하는 "무" 가 원기, 음양이기이면서도 동시에 자연무위라는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무" 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주역의 교훈은 모두 "유" 에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유" 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나아가 주역을 해석할 때에 체와 용의 범주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몇몇 개념들을 체와 용에 배속시켰는데, 주역정의는 체와 용을 모두 중시하지만 체가 용에 비해 더욱 근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주역정의는 음양이기가 우주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근원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와 같은 견해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주역정의는 주역 속에 출현하는 건원과 곤원이 각각 양기와 음기를 가리키고 음양이기가 만물을 나타낸다고 논술하였다.
인사의 측면에서 주역정의는 주역의 괘효사가 인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하였으며 주역의 문장을 해석할 때에 몇몇 특정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이러한 부분을 십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역정의는 성인과 군자가 주역을 제작하거나 사용하는 목적이 모두 인사의 제고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인사를 중시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주역정의는 예에 근거하여 생활을 영위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인사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리하여 현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며 현인을 길러내는 것은 인사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주역정의는 역학과 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하였는데, 주역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견해는 모두 주역정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주역정의의 이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역정의는 당대 이후 송명이학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치기 되는데 송명이학의 형성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들은 모두 주역정의의 해석을 기반으로 중요한 견해들을 제기하였다. 주역정의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으로 주역정의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은 모두 주역정의가 왕필과 한강백의 주석을 저본으로 선택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이것은 모두 주역정의의 표면적인 모습만을 판단한 것으로 주역정의의 의도와 문장을 심도 있게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