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研究考察了, 权威主义倾向较强的全斗焕总统在对华政策上, 积极反映自己政策理念的方法. 本研究运用政策理念的概念, 分析了全斗焕时期韩国政府的对华政策. 所谓政策理念是指政策负责人在进行决策行为时作为判断标准的信念或理念指向. 因此政策理念, 包括决策者的偏好或价值观, 或由决策者通过政策获得的利益为达到特定目的的思维过程. 对领导的政策理念与政策关系的研究, 即是对领导为获得政治利益而推进的政策所带来的权力变化的考察. 因此本研究涉及的核心问题为: 全斗焕的权威主义为何能够在朴正熙权威主义之后持续存在及其对华政策为这一持续发挥了什么作用.
本研究的各部分的主要内容可以分为四类. 第一, 考察全斗焕的权威主义统治方式的起源和执政初期的韩国国内情况. 全斗焕的权威主义统治基础不是他在任总统期间自己制定的, 却是利用了朴正熙 16 年在任期间巩固的权威主统治方式. 即, 全斗焕已经具备了执行权威主义统治的基础. 全斗焕执政初期, 韩国内外多逢忧患 . 持续到 20 世纪 70 年代中期的高速增长因第二次石油危机与重化学工业政策的失败而中断, 反而却出现了超过 30%的恶性通货膨胀这一前所未有的状况. 同时, 国家经济出现负增长, 甚至面临国家破产的可能性. 雪上加霜的是, 朝鲜实施对韩强硬政策, 使国民陷入经济不安和安保不安的境地. 更何况, 朴正熙逝世后, 国民对政治的不满情绪逐渐浮出水面, 使整个社会陷入混乱. 通过军事政变掌握了政权的全斗焕为了挽回自己的统治弱点, 需要解决国民面临的经济和安保问题是不可避免的.
第二, 考察全斗焕政府改善对华关系的方式. 韩国政府认为, 在 20 世纪 80 年代初期, 韩国的友邦国家的美国, 日本与中国关系飞速发展的情况下, 改善同中国之间的关系将有助于营造有利于韩国的半岛局势. 全斗焕为了使自己能够积极地反映政策理念, 直接或间接地介入了政府各部门拟订并推进的对华政策. 全斗焕主要通过自己的亲信--国家安全企划部部长, 试图在对华政策领域积极反映自己的政策理念. 全斗焕让国家安全企划部部长领导曾全权负责的韩国对外贸易业务的工作小组的海外协力委员会, 从而主管制定对华贸易政策. 国家安全企划部有权监察政府部门和官僚的业务, 因此全斗焕通过国家安全企划部能够掌握了政府各部门的对华政策业务, 并试图将总统自身的政策理念积极反映到政府的对华政策中.
第三, 分析全斗焕政府推进的对华政策的效果. 韩国政府积极利用从 1979 年开始通过香港开展的韩中间间接贸易作为改善与中国的关系的手段. 韩国政府不仅让韩国企业通过香港与中国积极交流, 还让韩国驻外外交机构积极与当地的中国外交官, 中国专家, 华侨进行接触, 试图确保与中国的多种接触方式. 另外, 韩国政府接受中国国籍的货船进入韩国港口运输韩国的出口商品, 拒绝了中国人向韩国驻外外交机构申请流亡或帮助第三国流亡的要求, 从而积极向中国表明改善关系的信号. 中国也对改善与韩国的关系表现出肯定的反应. 随着韩中接触的增加, 过去互相敌视的因素影响减弱, 从友好的角度相互认识的因素也增加了. 在实施小规模间接贸易时, 难以对对方的信号和性质做出准确的分析, 但是随着贸易规模的扩大, 可以确认相互间的信号和接近方式的特征.
第四, 分析韩中的接近与韩国国内的经济, 政治上的变化的关系. 全斗焕重用支持民间主导的经济体制倾向较强的经济官僚和经济学家, 试图建立民间主导的经济增长模式. 20 世纪 70 年代末期, 重化学工业阻碍了韩国经济发展. 因此全斗焕政府果断进行了结构调整, 摆脱了政府对金融市场产生强大影响的方式, 实施了亲市场性金融政策. 1983 年以后, 原有的恶性通货膨胀上涨率开始趋缓, 韩国经济开始复苏, 于是试图营造带动韩国经济发展的新产业成长的经济环境. 与此同时, 鞋, 服装等劳动密集型产业曾经是主导了韩国出口的产业, 但随着中国在改革开放后重点培养此产业, 韩国的竞争力减弱, 处理进入夕阳阶段的劳动密集型产业. 韩国政府构想的确保夕阳产业竞争力的最佳方法是将生产基地转移到中国, 而当时韩中关系的改善正使夕阳产业生产基地转移到了中国. 韩国企业生产基地向中国转移, 对两国在国际贸易中深化竞争关系转型为互利互助关系起了作用. 随着韩中关系不断增进, 朝鲜最终也将对韩强硬政策转变为对话政策.
全斗焕利用已有的权威主义政策理念, 对国家政策产生了深远的影响. 全斗焕执政时期在反政府运动不断的社会混乱中, 他却是成功地使其效果有助于自己的权力稳定. 也就是说, 改善同中国的关系解决了韩国国内的安保问题和经济问题, 并以此为基础进一步加强了干预国家决策的力度. 通过本研究可以确认, 国家实施的经济领域的对外政策是反映国内特殊环境的国际政治经济理论也可以适用于 20 世纪 80 年代的韩国情况. 除外, 在论证本研究的核心问题之过程中所提的权威主义领导即使没有道德素质, 对有效执行国家政策不会产生大的负面影响, 这可以作为对新兴工业化国家的非民主经济发展方式的现有研究的案例.
본고는 정책이념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전두환정부시기 행해졌던 여겼던 중국과의 관계개선과 국내의 안보정책과 경제정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정책이념이란 국가정책에 담긴 지도자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은 적극적으로 추진한 대중관계개선정책은 경제발전동력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성장 동력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의 남한에 대한 강경한 태도변화를 유도하여 안보적으로도 안정적인 상황을 만드는데 활용되었다. 본고는 세가지 측면에서 전두환정부의 대중관계증진전략을 분석하였다.
첫째, 전두환 정권이 권위주의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과 자신의 권위주의 리더십을 외무부에 구체적으로 투영시키는 방법에 대해 분석하였다. 전두환은 유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구축한 유신체제를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전두환도 권위주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의 정책결정의 자율성을 확보하였고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국가지도자로서의 통치정당성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시도한 방법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제일, 경제발전 동력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제이, 북한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전두환이 이 두가지를 이루기 위해 역점을 두었던 정책이 바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이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중국이 자국의 개혁개방에 부합하는 한국의 한반도의 긴장완화방식을 지지하도록 하여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이 증폭되더라도 중국의 연루가능성을 낮출 수 있고, 이를 통해 북한의 강경대남정책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중국은 한국의 정치적 관계증진 시도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1979년부터 비정치적 분야인 무역부분에서는 홍콩을 통한 간접무역을 정식으로 실시하며 한국의 관계개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러한 한중간에 간접무역이라는 비정치적 분야에서 관계개선이 시작된 것은 한중 양국 모두 북한의 반응을 염두 해 둔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한중간의 비정치분야에서의 교류는 다분히 정치적 고민의 결과였다.
전두환은 자신의 정책이념이 외교부와 경제기획원등 관료주의성향이 강한 부처가 중심이 되어 추진했던 대중국정책에 효과적으로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최측근이 수장으로 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중국과 관련된 국가정책 전반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전두환의 통치가 지속될수록 정부부처의 대중국정책의 기획과 집행에 규칙이 생성되고 효율성도 증대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한중간의 관계개선 초기단계의 한국의 전략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둘째, 전두환의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협상력을 낮추는 전략을 구사했던 이유를 분석하였다. 한국정부는 중국이 접촉하기 원하는 방식과 조건을 수용하려고 하였고. 관계개선을 원한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전두환정부는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경제 무역분야에서 공동의 이익이 형성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중국의 경제적 이익이 증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가 재조정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전두환정부는 한중관계 개선의 초기 단계에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증진시키는 데 활용되는 수고와 손해는 양국관계가 증진된 이후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매몰비용으로 본 것이다.
셋째, 한중관계개선이 한국경제구조조정에 미친 긍정적 효과를 분석하였다. 즉, 전두환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중국과의 관계개선정책이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내경제에 미친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전두환은 경제발전의 동력을 회복시켜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둔화와 경기후퇴 현상을 극복하여 자신의 통치정당성을 강화하려고 했다. 전두환은 두 가지 방향에서 경제구조조정을 실시하였다. 첫째, 금융정책을 대폭 조정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가 민간금융기관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며 국가가 전략산업으로 선택한 분야에 금융기관의 자본을 지원하도록 강요하던 방식을 정비하였다. 둘째,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던 높은 무역장벽과 관세를 낮추었다. 그러나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개방경제를 채택한 한국의 첫번째 경제구조조정은 두번째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사전작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전두환 시기 국내산업구조조정은 결국 국제무역환경의 구조적 변화가 한국의 산업구조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즉, 중국이 개혁개방이후 국제무역의 가치사슬에 편입되면서 한국의 일부산업의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점점 약화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내 비교열위에 내몰린 산업은 생산비용을 줄이기 위해 생산시설의 중국 이전을 시도해야만 했다. 다행히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달러가치가 하락하자 달러가치에 연동되었던 한화 역시 그 가치가 하락하였기 때문에 한국은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던 산업의 구조조정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1985년 이후 중국과의 공개적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기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980년대 중반 이후 한중간의 직접무역의 공식화와 정치적 관계개선의 본격적 시작은 한국 제조업분야 생산기지의 중국으로 이전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며 한국의 산업구조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국민들이 지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전두환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한국의 안보정책의 강화와 경제발전동력의 회복을 위한 핵심사안으로 인식하고, 목표달성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여 성공하였고, 자신의 통치정당성을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