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는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활동한 正祖·純祖代의 館閣文人 金祖淳·南公轍·徐榮輔·沈象奎·李晩秀의 교유 양상과 시 세계를 살폈다. 다섯 문인은 조상 대대로 朝廷의 大臣을 지낸 京華世族으로, 정조의 신임을 입어 奎章閣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정조 사후 『正祖實錄』과 『弘齋全書』의 편찬을 감독하면서 太史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순조대에 文衡과 宰相職을 담당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태사는 정조대에 규장각 閣臣으로 활동하며 형성한 동질감을 바탕으로 노년기까지 친분을 유지하였고, 漢詩를 통한 교유를 지속하였다. 이들의 한시에는 경화세족이자 규장각신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관료로서 지닌 고민과 성찰 및 동료애가 담겨있다. 또한 이들은 경화세족으로서 당대 도성의 최신 유행을 함께 향유하였다. 그러므로 오태사의 한시는 정조 후반에서 순조대를 대표하는 관료의 의식과 경화세족의 문화생활 및 심미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오태사는 그들의 조상부터 대대로 조정의 주요 관직을 역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찍이 정조의 관심과 신뢰를 입고 관료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조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정조 死後에도 그를 추모하는 시를 다수 창작하였다. 오태사는 정조 재위기에 각신으로 활동하며 정조의 御製詩에 賡載하는 자리에 자주 참여하였는데, 당시 갱재시를 통해 정조와 공유한 시적 정서는 정조가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오태사의 시에서 유사한 시상으로 발현되었다. 이는 오태사가 순조대에도 여전히 정조의 遺旨를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오태사는 『홍재전서』의 편찬을 계기로 후배 관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교유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시를 통해 각신 출신으로서의 자긍심과 동료애를 거듭 표출하였다.
오태사는 관각문인으로서 외교사절의 임무를 맡아 燕行을 경험하였고, 서로의 연행 때마다 餞別의 모임을 열고 餞送詩를 지어주며, 연행 도중에도 시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들이 연행을 매개로 주고받은 시편에는 외교사절의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드러나는 한편, 청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知的 관심이 포착된다. 오태사의 연행 전송시를 통해서 이들이 기본적으로는 尊明排淸의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현실 정세를 파악하고 실질을 추구하는 對淸認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청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다채로운 문화에 개방적이었고, 연행을 통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욕구를 보이기도 했다.
오태사는 가을의 경물을 읊으며 노쇠함으로부터 비롯된 서글픔과 人生無常을 종종 표출하였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유행한 秋題詩 창작 경향과 맥을 같이한다. 이들은 李白의 〈尋陽紫極宮感秋作〉에 次韻하여 관료로서 살았던 지난 삶을 성찰하고 謙讓의 미덕을 반추하였다. 〈秋思詩〉에서는 가을 텃밭에 맺힌 열매와 씨앗을 통해 有終의 美를 거두기 위한 앞으로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의식을 드러내었다. 특히 이들은 시들어가는 국화의 형상에 주목하여 자신들과 동일시하였는데, 허무와 슬픔에 침잠되지 않고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을 기대하는 미래지향적 태도를 보였다.
오태사의 한시를 통해 경화세족의 문예 향유 양상과 심미 의식도 확인할 수 있다. 오태사는 도성 안이나 도성 인근에 別墅와 樓亭을 마련하여 閑居를 누리는 市隱의 삶을 추구하였다. 대표적으로 김조순의 玉壺亭과 심상규의 亦愛吾廬·偶亭은 陶潛의 田園 풍경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공간을 구성하였고, 그 안에서 지은 시에서도 도잠의 전원생활과 유사한 정취가 드러난다. 김조순과 심상규·이만수는 서로의 누정에 題詩를 지어 그들만의 남달리 脫俗的이고 高雅한 경지를 부각하고자 하였다.
오태사의 園林 경영에 대한 열정은 花卉 재배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지속적인 연행을 통한 청나라 화훼의 유입으로 더욱 이국적이고 희귀한 화훼로 오태사의 완상 대상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화훼가 바로 水仙花이며, 오태사는 수선화 재배법을 공유하고 이를 완상하며 적극적으로 花品을 논하였다. 또 한시를 통해 수선화 고유의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시적 형상화에 대해 고민하였다.
오태사는 지방관으로 부임해서도 평소 도성의 명소와 누정을 통해 향유했던 문화를 토대로 해당 지역에서 경관을 새롭게 경영하였다. 심상규가 南漢山城에 새로 경영한 有此山樓와 玉泉亭은 남한산성이 위치한 日長山의 경관과 정취를 향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고, 김조순·남공철·이만수 등 동료 관각문인들의 詩文에 힘입어 명소화되었다. 그리하여 丙子胡亂 이후 아픔의 기억을 간직한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淸淨의 경지를 누릴 수 있는 遊賞地이자 휴식의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19세기 한문학 경향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慕蘇 경향은 오태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시를 통해 學蘇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었고,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蘇軾의 굳센 지조와 정신력을 흠모하고 이를 닮고자 하였다. 오태사는 소식처럼 관직 생활에서 큰 고난을 겪지는 않았기에, 소식의 삶을 자신들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생동안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유쾌한 발상을 하였던 소식의 고상하고 낙천적인 삶의 가치관에 매료되어, 이와 유사한 경향의 遊戱的 시 창작을 시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