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윤이후의 『지암일기』를 통해 17세기 호남사대부 윤이후의 일상생활을 본 논문은 윤이후(尹爾厚, 1636~1699)의 『支菴日記』를 통해 17세기 호남사대부 윤이후의 일상생활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중에서도 '생활문화적 기호'와 '인적 네트워크'라는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삼았다.
윤이후는 그 개인으로 보면 1689년(숙종 15) 5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2년여의 기간을 끝으로 사직하고 해남으로 귀향하여 생을 마친 인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윤이후는 그의 가문과 함께 보았을 때 다채로운 방면에서 조명될 수 있다. 윤이후는 해남윤씨(海南尹氏) 어초은공파(漁梅隱公派)로,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의 6세손이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손자이자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생부이다. 해남 연동에 세거하며 '연동 해남윤씨가', '윤선도가'라고 불렸던 그의 가문은 조선 사회에서 특수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대부 가문에서 쉬이 찾아보기 힘든 몇 가지 면모 때문이었는데, 적극적인 치부(致富) 활동, 풍수지리와 의약학과 같은 생활친화적 잡학(雜學) 공부,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향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윤선도를 필두로 하여 윤선도의 현손(玄孫) 윤덕희(尹德熙, 1685~1776)까지 이어지는 가풍으로 규명되어 학계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지암일기』는 그가 함평현감을 그만두는 1692년(숙종 18)부터 사망하기 사흘 전까지의 기간동안 작성한 일기이다. 공간적으로는 초반 약 3개월 동안의 함평현감으로서 함평에 거주할 때와 타지역을 방문할 경우를 제외하면 해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연동 해남윤씨가의 일원으로서의 윤이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지암일기』를 사료로써 접근하고,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지암일기』를 통해 여태 문집 등에서 추출되어 연구되었던 연동 해남윤씨가의 생활상에 풍부한 입체감을 더하고자 했다.
조선시대에서 잡학으로 분류되었던 풍수지리, 의약학에 대한 윤선도의 전문적인 지식 보유에 관한 측면은 그 특수성이 주목되며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한 지식의 보유가 보이는 계승의 양상과, 그것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지암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었고 본 논문에서 생동감 있게 구성해냈다.
한편 『지암일기』에서는 여태의 사료에서 발견하기 힘들었던 연동 해남윤씨가의 생활문화의 기호와 향유라는 지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윤이후로부터 보이는 독특한 동식물에 대한 애호를 통해 화훼벽(花卉癖)이 갖는 지식문화적 의미를 밝혔으며, 기존에 논해지지 않았던 해남윤씨가의 말에 대한 애호가 윤두서의 회화 세계로 확대되는 모습을 찾아냈다. 또한 연악(宴樂)과 글씨에 대한 기호가 생활 속에서 공감 및 공유 장치로 활용되는 양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의 인적 네트워크가 일기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숙종대에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를 정치적 타자와 정치적 동지에 해당되는 '갑술유배남인'을 통해 확인했다. 정치적 타자의 경우에는 인척 관계를 맺으며 지내다가도 정국 상황에 따라 거리감이 생기기도 하는 집단도 있는 한편, 정치적 타자 간의 대립과 단절을 당연하게 전제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생활상이 포착되는 집단도 있었다. '갑술유배남인'에 대해서는 그가 표방하고 있는 주인의식을 통해 정치적 약자로 전락한 동지와 일상 속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드러냈다.
이러한 윤이후의 개인적인 생활상에서 특수성과 보편성을 추출하여 17세기 호남 사대부라는 한 개인의 생활상을 포착해낼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