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중국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해 왔다. 당대(唐代)에 전래 된 경교를 해석한 틀은 불교와 도교였으며(以佛老釋耶), 명청(明淸) 시대에는 유교로 기독교를 해석하였다(以儒釋耶). 그들에게 토착화(本色化)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통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타 종교의 변형까지도 개의치 않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선이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당대와 원대(元代)를 거치며 유교화(Confucianization) 되었고 명대에는 탈 기독교화 현상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배타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 마테오 리치는 고전 유학으로 당시의 신유학을 비판하는 대담한 방식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그가 중국문화와 전통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중국문화를 끈질기게 다루는 인내심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리치는 예수회 전통 선교방법에 따라,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중국문화를 재해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천(天)사상을 기독교 하나님과의 접점(Missionary Point of Contact)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적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던 당시의 천이 본래는 종교적인 언어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신유학을 버리고 원시유교 즉 선진유학(先秦儒學)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고대 전통 속의 상제 사상을 『시경』을 중심으로 발굴하여 그가 『천주실의』에서 주창한 천주의 용어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천은 기독교 신관을 담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원시유교에 남아 있는 원형적 종교의 흔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천의 언어적 배경이 너무 빈약하였다. 원시유교와 기독교의 연결고리로 쓰기에는 종교색이 더 짙은 제(帝)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리치가 제보다 천을 선택한 것은 형이상학 일변도였던 당대의 지식인들과 소통하는데, 천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당대의 유학자들과 스콜라 철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던 리치가 천을 통하여 담론을 이어갈 수는 있었겠지만 천이 가지고 있던 비인격성과 반종교성은 기독교를 바르게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보유론(補儒論)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다. 당장 성과를 위해 선택한 논리가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장기적 선교에 방해가 된 것이다.
리치가 시도한 보유론적 선교는 비록 용어적 차용으로 시작되었으나 필연적으로 중세 가톨릭적 세계관과 신유학 사이의 내적 갈등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용어가 가진 복합적인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중국문화가 가지는 복잡한 속내를 간과한 다분히 억지스러운 봉합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둘 사이의 갈등은 오류와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상대문화에 대한 존중의 결여에서 발생한 무례함과 불쾌감의 문제일 수 있으며 조악하게 이루어진 포교내용에 대한 불만족에서 오는 반응일 수도 있다.
리치의 보유론과 유교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괴리는 빈약한 유교 신관에 기독교 신관을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적응주의 선교방식은 중국문화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과 판단을 기초로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소개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천주의 용어적 한계에 갇혀 삼위일체론을 전개할 수 없었고 대속과 복음도 바르게 제시하지 못했다.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서 유교와 비슷한 부분을 부각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계시 종교적 특성들은 탈색되었다.
활동이 미미했던 이전의 선교사들에 비해 뚜렷한 가시적 성취를 이룬 리치의 업적은 기독교의 대중국 선교역사에서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국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최초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리치의 선교는 선구자적인 성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가 창안한 보유론을 되돌아보고 그 한계점을 재고해 보고자 하는 이유는 여전히 중국 내에서 그의 선교 결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성취보다는 숙제가 더 많은 중국 기독교의 현실 때문이다.
중국 기독교에 보유론이 끼친 결과물들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외적인 성과 뒤에 숨겨진 보유론의 핵심적 요소들을 들여다보면 마냥 성공이라고 볼 수 없는 측면들이 있다. 보유론이 유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기독교의 정체성이 어지럽혀졌고 적응주의 타협적인 접근방식은 기독교의 본질인 고난과 역경을 견뎌낼 수 있는 깊고 강인한 신앙 정신의 부재를 낳은 것이다. 리치의 보유론은 기독교라는 이름은 잘 소개하였으나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낮은 단계의 포교에 그쳤다.
중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보유론에 대한 자조적인 비평은 기독교 신학의 문제를 서구에 대한 저항적 문화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중국 학자들의 입장이 다소간 투영된 것은 사실이다. 중국 내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한어신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은 보유론의 명과 암을 모두 경험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보유론에 대한 평가는 보유론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중국 현지인들의 반응과 평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중국 내에서 보유론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단지 그들이 배타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유론의 경우에서처럼 기독교의 본질이 아닌 다른 요소들이 포교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영향이 고스란히 중국 기독교 선교에 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종교가 문화의 옷을 전혀 입지 않고 이상적인 신학만으로 전달될 수는 없겠지만 종교의 문화적 속성이 종교 본연의 속성보다 더 관심을 받는 것은 위험하다. 수단을 강화하다가 목적을 상실한다면 문화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종교가 도리어 문화의 영향으로 변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간 중국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많은 중국 기독교인들은 문화적응주의 일변도의 방식에 수정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있다. 기독교 고유의 신관과 성육신, 대속 등 중심교리들이 중국인들에게 이질적이어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문화에 싸서 감추거나 유교와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탈색시키지 말아야 한다. 선교에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반기독교적 문화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선교의 한 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전통적인 중국의 천사상과 천에서 파생된 천주의 용어적 한계에 주로 집중하였지만 향후 범위를 좀 더 확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분야에 대한 보다 획기적인 연구와 성과물들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그간 중국 내에서만 존재하던 적응주의 보유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재해석적 노력이 중국을 넘어 다양한 세계에서도 논의되고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