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 지방에서 한인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 국권의 침탈 이후 압록강 대안의 유하현, 관전현, 집안현, 환인현 등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활동하던 한인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삼아 보다 실제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무장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의병·유림계통의 인사들은 보약사·향약계·농무계·포수단 등의 단체를 통합하여 왕조를 부활시키려는 복벽주의의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한인들은 한족회와 군 정부를 조직하였다. 1919년 11월 군정부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명칭을 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때에 광한단이 새로이 조직되었다. 그동안 광한단은 1920년 초에 관전현 향로구에서 한족회·서로군정서의 소극적인 투쟁에 실망한 한족회 내의 소장파 현정경, 현익철, 이시열, 이호원, 김석손, 홍원경 등이 국내에서 서간도로 새로 들어온 장명환, 김관성, 이춘산, 김태호, 박정호 등과 함께 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광한단에 대하여는 그 조직 시기와 배경, 주도 인물, 구체적인 활동 내용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광한단은 1920년 봄, 즉 2월에서 5월 중에 조직되었다. 이때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서·북간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편재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탁이 서간도에서 광복군총영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던 소장파들은 광한단을 조직하였다. 이는 광한단의 독립투쟁 노선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이승만의 노선과 달랐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대한광복군사령부와 대한광복군총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또 광한단의 목표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고 일제 관원과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이시열 등은 서로군정서의 소극적인 무장투쟁에 만족하지 못하고 광한단을 조직한 것이다.
광한단의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내 소장파와 국내에서 서간도로 들어와 합류한 인물, 그리고 기존에 서간도에서 대한독립단과 대한청년단연합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광한단의 단원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이 공화주의를 지향하였으나 안창호·이승만과 같은 기독교 계통이 아니라 대종교 계통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에서 광한단으로 합류한 이들은 화서 이항로 학파 출신이 다수였다. 이들은 또 한족회·서로군정서의 이상룡 등의 소극적인 무장투쟁에도 반대하였다.
1920년 당시 광한단원은 100여 명에 이르렀다. 광한단의 주도 인물의 반 이상이, 그리고 단원의 70% 이상이 평안도 출신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평북 출신이 많았다. 광한단 구성원의 연령은 주도 인물의 반이 30대이고, 단원은 반이 20대이다. 광한단의 80%가 2·30대 젊은이들이었다.
광한단은 전국의 각 면에 지단을 설치하여 단원을 확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그 지단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단원 대부분은 연고지가 있는 평안남·북도에 집중되었다. 광한단은 1920년 6월 이후부터 평안남도의 평양과 박천, 평안북도의 정주 등지로 단원을 파견하여 지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현익철이 경상북도 안동에서 체포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광한단은 경상도에도 단원을 파견하여 지단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100여 명에 이르는 단원이 권총으로 무장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광한단은 1920년 12월 평안남도에서 단원 9명이 체포되어 그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많은 단원이 체포되는 등 위기에 처했다. 단장 이시열도 1921년 2월 국내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을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활동이 어려워지자, 광한단은 다른 무장독립운동단체와 힘을 합하기 위하여 1921년 4월 북경군사통일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렇지만 주도권 장악의 다툼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시열에 이어 광한단의 단장이 된 현정경은 1922년 초 양기탁의 남만주통일운동에 참여하여 그해 중반 대한통의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광한단 출신의 수명의 단원은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 통의부가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재편될 때, 광한단의 단원들은 대체로 정의부에 참여하였다. 광한단 출신인 고할신은 1924년 10월 길림에서 김동삼 등과 전만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현정경은 1925년 통의부의 의용군 6·7·8 중대를 이끌고 정의부에 합류하였다. 또 이호원도 1928년 형을 마치고 만주로 돌아와 정의부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