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아시아의 도자기와 차 무역을 주도하였던 네덜란드는 유럽 각국의 왕후 귀족들에 중국 차와 도자기를 소개했다. 초기에는 모두 고가의 제품으로 중국 자기 잔에 차를 마신다는 것은, 특권이자 부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 자기 소성 기술이 없던 유럽 왕실과 상류층은 앞다투어 자기를 수집하였고, 동방 무역 확대를 위해 유럽 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동방의 물품을 얻기 위한 유럽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시아 여러 지역은 동방 무역 거점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 된다.
도자기와 함께 전해진 비단, 칠기, 차 등 동양의 물품은 유럽 사회,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럽에 들어온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 문화와 결합하여 이른바 '시누아즈리'라는 독특한 이국적 풍조를 형성하며 특히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실내 장식이나 공예,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청화백자는 시누아즈리의 중심에 있을 정도로 유행했는데, 중국 자기에 자극 받은 유럽의 각국은 자기 소성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1709년 마이센에서 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이 자기 제작 기술이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각국의 자기 제작소들은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정교하고 화려한 자기를 만들어 냈다.
차 도구에 표현된 도자기의 모티브와 디자인, 차 문화 공간의 실내 장식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 양식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갔다. 차와 도자기가 유입되던 시기인 16~17세기의 바로크 양식과 18세기 초·중반의 로코코 양식에 영향을 끼쳤던 시누아즈리, 18세기 중반 이후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뿌리를 둔 네오 클래식의 양식으로 표현된다. 예술 양식은 단순히 예술에만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종교, 철학 등 시대상을 반영하였다.
차가 유럽 사회에서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기까지, 도자기는 장식품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차 도구로써의 역할도 커졌다. 유럽의 도자기는 유럽인들의 생활속에 자리하며 차와 함께 발전해 왔다. 차 도구는 19세기 등장한 애프터눈 티 테이블의 중요한 요소로, 유럽의 도자기 산업의 발전은 차 문화가 정착하는데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국의 산업혁명 성공으로 수공업식 생산에서 기계식 생산체제로 전환되는데, 전사법의 개발로 공장에서 똑같은 문양과 형태의 도자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본차이나(Bone China) 기법을 발전시켜 도자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국의 도자기 산업의 발달로 저렴한 가격에 차 도구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과 18세기 중·후반에 차의 가격 인하로 노동자 계층까지 확대되어, 차 도구에 대한 수요가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