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 남긴 유묵(遺墨)을 대상으로 서예학적 관점에서 서체 특징을 분석하고 유묵에 내재된 미학적 사유를 종합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가진은 한학과 서예 방면에도 뛰어나 그의 필적은 근대 한국서예사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가진은 안동 김문의 일원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11대손으로, 정통 유학자 집안의 훈육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서자라는 신분적 배경으로 관직 진출에 제약이 있어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에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조연(李祖淵, 1843-1884)의 천거와 고종의 별입시(別入侍)를 통해 문과에 급제하면서 지방, 중앙, 외교 등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김가진은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박탈되자 깊은 회한과 좌절에 빠지면서 1919년 상해 망명 이전까지 선경불원인(仙境不遠人)의 경지를 지향하였다. 그 당시 퇴은(退隱)의 선비적 삶을 실천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시(詩), 서(書)에 몰입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김가진의 유묵은 1900년대 전후부터 1922년까지의 행서작품이 주를 이룬다. 이들 작품은 기본적으로 서예의 높은 예술적 성취는 물론이거니와 서예를 통해 지향했던 그의 유가·도가적 사유가 동전의 양면처럼 임리(淋漓)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1900년을 전후한 작품들에서는 유가적 세계관을 견지한 세독충정(世篤忠貞)의 정신이 뚜렷하였다. 조선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안동 김문 출신이자 고종의 최측근 고위관료라는 신분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당시 김가진은 유교적 세계관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특히 정치 활동이 활발했던 1900년 전후의 유묵은 대체로 입신양명과 절의충절에 기반하여 유가적 중화미(中和美)를 견지했으며, 글씨 또한 경건(勁健)·호방(豪放)하며 순정(純正)한 서풍(書風)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1905년 을사조약을 기점으로 선경불원인의 은일정신을 지향하면서 퇴은의 선비적 삶을 실천하였다. 이 때부터 유(儒)·도(道)의 은일적 사유가 혼재하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즉, 1914년까지는 도가의 은일적 사유가 주로 작품에 담겨있으며, 1916년 이후부터 상해 망명 이전인 1919년까지는 종오소호(從吾所好)의 유가적 은일이 두드러졌다. 서풍은 유가적 전통서법에 기초를 하되 미불, 동기창 서예의 영향을 받아 강건하면서도 연미(姸媚)하고, 소박하면서도 유려한 복합적 사유가 내재되었다. 말년기의 작품은 온후(溫厚)·연미(姸媚)한 특징을 띠면서 인서구로(人書俱老)의 경지를 구현하였다.
한편, 소자서(小字書)의 연미하고 유려한 특징과는 대조적으로 대자서(大字書)는 고졸한 풍격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사기(寫記) 정보가 없는 해내존지기(海內存知己)라는 두인(頭印)을 날인한 여러 작품이 눈에 띄는데 여기서는 연미한 서풍과 함께 초솔(草率)하고 평담(平淡)한 특유의 서풍도 발견된다.
김가진의 서예는 간난신고(艱難辛苦)한 삶을 유·도 융합적 예술경지로 승화시켰다. 그의 유묵은 글씨[書]와 인간[人]을 동일시하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의 심서일원(心書一元)적 사유를 실천한 삶의 성과라 하겠다. 따라서 김가진의 유묵은 그의 삶과 정신과 예술이 합일된 미학적 결정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