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李珥)는 조광조(趙光祖)를 '우리나라 도학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칭하였다. 38세의 굵고도 짧은 생애와 극적이면서도 불꽃 같은 삶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도학자이자 우리 역사상 가장 순정한 선비 조광조는 한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 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을 수행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조선 중기 선조 대에 훈구세력의 기반이 약해지며 사림 인사들의 주도로 경기지역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 시기는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류(己卯士類)들의 신원이 이루어지던 때로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은 정치 행정적인 기능이 여타지방에 비해 정국의 변동에 직접적인 여파를 받았던 지역이었다. 중종 대에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구현하다 피화된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경기 양주에 건립된 도봉서원은 근기(近畿)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 사액 된 곳으로 건립이후 서울 경기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중앙관료를 비롯한 사대부들의 주요한 교류처였다. 1949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서울로 편입되어 현재는 서울시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서원이 되었다.
서울시 도봉구 도봉산 자락에 서울시 유일의 서원인 도봉서원이 있다. 도봉서원은 조광조가 유년의 호연지기를 키웠던 곳으로 조광조 사후 조광조의 도학정신을 잇고자 하는 유림들의 자발적 봉사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다. 주변 계곡에는 유사들이 남긴 십여 개의 바위 글씨도 남아있어 도봉서원과 함께 서울시 기념물 28호로 보존되어있다. 그중 서원 터 바로 앞에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있다. 『시경(詩經』「소아」高山仰止景行行止(높은 산은 우러러 멈추고 큰길은 걸으며 깨닫는다)를 김수증(金壽增)이 멋진 팔분체로 써놓은 것이다. 하늘이 부여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하늘이 부여한 직분을 구체적 현실에서 실천하여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조광조 학문의 진정성과 사회적 실천(修己安人)하고자한 지식인의 고뇌와 사명, 그리고 바른 형식을 통한 바른 실천가 조광조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묘사화로 피화된 조광조의 삶과 조광조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도봉서원의 위상을 도봉서원을 찾은 유생들 남긴 문예로 찾아보고 훼철된 도봉서원을 복원하여 도학을 교학하고 현대로 이어지는 공간적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