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집안시에서 「集安高句麗碑(이하 집안비)」가 발견되었다. 집안비에는 고구려의 개국 및 왕위 계승과 정통성, 왕릉 수묘 관련 사항이 언급되어 「광개토왕비(이하 능비)」와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능비는 비의 주인이 광개토왕이고 비의 형태는 石柱形, 집안비는 圭首形으로 각각 선왕의 절대 권위와 후대 왕·신하의 절대 복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능비와 집안비 모두에 등장하는 "立碑"와 "銘"을 전후한 내용 및 행위가 기계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선입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능비문의 "墓上立碑", 그리고 집안비문의 "선왕의 공훈을 추술한 곳"은 능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능비에 '舊民' 수묘인연호들이 1차로 수묘역에서 免役될 때 "復取"된 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復取"는 免役이 유예된 것이며, 능비에는 이미 이들 역시 추가로 면역될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 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장수왕은 부왕의 교언을 영원히 거스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修復"은 능비에서 '國烟'이라 명칭한 '烟戶頭'의 수를 광개토왕 수묘제의 대전제대로 환원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以示後世"라는 표현과 함께 선포되었으므로 '萬年之後'까지 확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비는 광개토왕 수묘제의 시행을 선포하였고, 집안비는 최종 완성되었다고 공표한다. 이것이 집안비가 세워진 목적이다. 자연스럽게 집안비는 능비 이후에 세워진 것이며, 수수께끼와 같은 '其碑'는 능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능비는 수묘제를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立碑"와 "刑之"는 각각 '대민공표' 및 '국가의 개입과 철저한 관리 감독'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최종 완성된 수묘제에 있어 광개토왕이 갖는 권위와 상징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압도적인 위용의 거대석비인 능비와 비교하여, 규수형인 집안비의 형태도 상징적인 수사를 위해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집안비는 능비와 연동하여 광개토왕 수묘제의 이행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 왕릉 수묘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비문을 읽는 독자들은 보이지 않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눈으로 확인하였을 것이다. 능비와 집안비를 통해, 4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국가의 지배력이 미세한 분야까지 미칠 수 있도록 제도가 안착되어가는 과정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