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명대(明代) 문인사대부(文人士大夫)의 은일적(隱逸的) 차(茶)문화를 규명하기 위해 그 문화의 배경이 되었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변화되었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한 문인사대부의 차문화를 고찰하고자 한 것이다.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명(明)을 개국할 때만해도 강력한 황권아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가 통제가능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었다. 영락제(永樂帝)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실현가능한 이상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그 후 황권을 강화하려 재상제도를 폐지한 이래 환관의 권력이 되레 강해지면서 명이 멸망하기까지, 국정은 인선의치(仁宣之治)와 홍치중흥(弘治中興)을 이끌었던 몇 황제를 제외하고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자유로운 기능을 강화하면서 경제는 발전하였으며 그에 따라 사회전반의 문화도 발전하였다. 명의 중·말기에 들어서며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그동안 중국사회를 지탱해오던 기존 문인사대부의 정통적인 권위가 새로운 신사(紳士)층의 출현으로 인해 구별이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문인사대부는 부(富)로 무장한 신사층으로부터 품격을 지키기 위한 문인취향의 소비재를 찾으며 그들만의 구별된 신분의 우아함을 이어나갔다.
제도의 변화는 문화의 변화를 불러온다. 단차폐지령은 산차중심의 포차법과 함께 다구(茶具)의 변화를 불러왔으며, '홀로 차 마시는 것'을 숭상하는 문인사대부들의 심미의식이 투영된 자사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어우러지는 산수공간에서의 음차를 선호하게 되었다. 변화된 차문화의 형식적인 요소는 문인사대부의 은일사상(隱逸思想)과 만나면서 소박하지만 고상하고 우아한 명대의 차문화를 이루게 된다.
명대에는 조정에서 문인사대부가 공명(功名)을 펼치기에 힘든 시기였다. 그렇기에 문인사대부는 한걸음 물러나 은일(隱逸)의 삶을 택하였다. 은사의 중요한 특징 중 한 가지는 정신적으로는 세상에서 독립하여 자기 사상의 독립성을 지킨다는 것인데 결국 문인사대부가 지향하는 삶은 몸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만은 세속을 떠나 한가로이 자신의 사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심원(心遠)지향의 삶이었다. 진심으로 외물(外物)로부터 마음을 멀리하고 또 비워야만 제대로 된 은일적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주권(朱權)의 삶에서 '차 한잔'이 주는 의미는 시대의 흐름이나 풍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오르는 도가적(道家的) 차원의 통선령(通仙靈)의 모습을 보여준다.
명대의 문인사대부에게는 '구별짓기 문화'라는 또 다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취향으로 품격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였는데, 차사(茶事)를 통해 서로를 칭송하며 예술문화로써 서로 하나가 되었기에, 품차(品茶)는 그들의 품격을 높여주는 신분적 상징이 되었다. 명대의 문인사대부는 심리적 차별화에서 비롯된 취미활동과 기호품으로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세속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자아도취적인 미학에 차가 매개체가 되어 '구별짓기 차원의 은일적 차문화'가 형성되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를 통해, 이전시대의 문화요소로써 차가 주는 의미를 넘어, 명대의 문인사대부를 통해 드러난 구별짓기 차원의 은일적 차문화로 인하여, 더욱 고상하고 우아한 정신문화적 요소로써의 가치가 있는 동양사회의 차문화로 발전하였을 것이라고 밝히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