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소학교령」 시행과 함께 근대학교가 전국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1896년부터 통감부의 「보통학교령」 시행으로 한말 자주적 교육개혁이 좌절되는 1906년까지를 중심으로, 근대학교의 설립 양상이 당시 충북 지역에서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교육이 점차 제도화함에 따라, 교육과 학교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어떠하였고 그 특징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연구의 범위를 1896년부터 1906년까지로 하고, 충북 지역에 설립된 지방공립소학교와 사립학교를 대상으로 한정하였다.
문호개방 이후 추진된 개혁 입법과 개화 정책은 조선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교육 부문에서는 서구의 근대적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교육을 통해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취지로 전국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1896년 9월에는 전국적으로 38개 지역에 공립소학교를 설치하도록 하는 朝令이 시행되었는데, 그중에 충북 지역에서는 충주군과 청주군 2곳에 지방공립소학교가 설립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갑오개혁 이후 동학농민혁명, 청·일 전쟁, 을미사변 등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지방공립소학교는 제대로 설립될 수 없었다. 특히 충북 지역은 동학의 본거지였으며,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공립소학교의 운영 또한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도 근대적 형태의 공공 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아주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런대로 존재하였고, 더 중요한 것은 학교 설립을 위한 지역 나름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소학교령」이 시행되었던 약 10년의 기간 동안 충북 지역에는 총 3개의 지방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은 충북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학교로 인정 받아야 마땅하지만, 지금까지 그 실체가 명확하게 규명된 적이 없고 지방공립소학교의 역사를 이어받은 초등학교가 현재까지도 존재하나 그 學校史 또한 단절되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충주부공립소학교는 충청북도 관찰부에 설립된 소학교로, 충북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이다. 지방공립소학교는 전국의 주요 도시에 먼저 설립되었는데, 충주부공립소학교는 도 관찰부에 소재한 공립소학교였기 때문에 정부의 학교 보조금도 우선 지원되었고 학교를 운영할 교원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정규 교원이 지속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던 충주 일대는 치안의 부재가 상당하였고, 설립 초기의 충주부공립소학교는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없었다.
청주군공립소학교는 충주군과 함께 지방공립소학교의 설립 예정지로 선정되었으나, 학교 설립은 고사하고 정규 교원의 발령조차 몇 차례 없었던 곳이다. 이는 근대 교육기관에 대한 청주 지역의 불신과 무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역 유지들이 가졌을 서구 사상과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과 피지배층이 느끼는 외세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는 청주 지역에서 공립소학교가 설립되는 데 장해물로 작용하였다. 이후 開明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청주군공립소학교가 운영된 것으로 보이나,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당시 소규모로 산재한 가숙이나 학당의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황간군공립소학교의 경우 3개교 중 가장 늦게 설립되었는데, 충주군과 청주군의 사례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황간군은 당시 충북 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 산업화의 수혜를 입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부선의 착공이 결정되고 그 선로가 황간군 추풍령을 넘어가면서 황간군 일대는 교통의 요지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철도와 기차로 인해 자연스럽게 근대화의 산물을 접한 황간 지역은 개화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창구로서, 근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한 것으로 추정한다. 지역민들의 지원으로 두 번의 시도 끝에 황간군공립소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지만, 이내 「보통학교령」의 시행으로 보통학교로 전환되고 만다.
지방공립소학교와 함께, 충북 지역의 근대 교육을 주도한 것은 사립학교이다. 사립학교는 같은 기간 동안 충북 대부분 지역에 고르게 설립되었고 그 수도 지방공립소학교를 능가하였다. 충북 지역의 사립학교는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나, 지역 유지에 의해서 설립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것은 충북 지역이 전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화 정책의 영향이 덜 한 상황에서, 지방관과 지역 유지들이 지역사회에서 행사한 영향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충북 지역에서 사립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사례로, 충청북도 관찰사로 재임하였던 윤철규의 사례에 주목하였다. 표면적으로 그의 행적은 지방관으로서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앞장서고, 지역 발전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철규는 정부 정책에 부화뇌동하며,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여러 개혁조치를 단시간 내에 밀어붙였다. 그 결과, 낯설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책은 지역사회의 집단적 반발로 무산되었고, 신임을 잃은 윤철규는 교체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지방관들이 보여준, 학교 설립을 빌미로 학정과 수탈을 일삼는 등, 여러 비위 행위를 보였기에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에 동력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지방공립소학교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북 지역의 근대 교육 보급에 힘쓴 것이 지역 유지로 대표되는 지식인 계층이다. 이들은 지역 내에서의 두터운 신망과 그들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사립학교를 세웠는데, 이러한 사례의 충북 지역 대표적인 인물로 민영은과 김태희가 있다.
당대의 권세가인 여흥 민씨 가문에서 출생한 민영은은 관직 생활을 수행하면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괴산군수, 청주군수를 거치며 지역에서 근대 교육을 담당할 사립학교를 세웠으며, 학교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여 당시 충북 지역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교육을 비롯한 여러 자선사업을 통해 지역 내 본인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 있었고, 이러한 활동은 일제강점기 내내 친일 부역행위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김태희는 같은 양반 계층이었던 민영은과는 다르게 일찍이 서양의 학문과 기독교를 접하고 청주 지역에 근대 교육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여흥 민씨 가문처럼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동료들과 함께 광남학교를 세우고 부족하나마 근대식 교육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독교 선교사 민노아가 청주 지역에 사역하러 오자 그와 함께 학교를 더욱 확장시키고 청남학교로 개칭하여 학생들에게 기독교식 근대 교육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하는 계몽교육을 주도하였다. 또한 김태희는 3·1운동에 참여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요인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충북 지역 근대 교육사의 바탕을 이루는 사실로써, 그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을 검토하여 정리한 것이다. 충북 지역에서 근대학교의 설립은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설립된 학교들도 부실한 운영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의 의지는 충북 지역의 교육사로 기록되어야 하며, 지역사회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