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6세기에 이루어졌던 조선과 명나라의 서예문화 교류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 효과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교류 연구는 그 당시 조선 서예문화의 형성과정과 그 내용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라 판단하여, 교류와 서예문화 그 둘의 상호 관계를 분석하고, 그 특징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먼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을 국내적 요인과 국외적 요인으로 대별하여 고찰하였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적 요인으로는 '국왕과 정치세력의 변화', '경제적 발전', 그리고 '왕실의 사회·문화적 정책'이 있다. 조선 국왕 특히 중종은 명 황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당시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림세력 또한 명나라를 존숭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리하여 조선과 명나라는 이전보다 더욱 깊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당시에는 경제 또한 발전하였는데,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유통경제가 발달하게 되어 구매력이 증대하였고, 대명 무역 또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조선 사회의 전반에 송명이학이 스며들게 되었고, 왕실의 문화정책으로 인해 서적과 비첩 서회 등을 구하고자 하였다. 위와 같은 국내적 배경들로 인해 명나라와 활발한 서예문화 교류할 수 있었다.
둘째, 국외적 요인으로는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인식 변화'가 주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양국 관계를 알기 위해 명이 조선에 어떠한 인식을 가졌는지 확인하였다. 명 황제 가정제는 조선에 정중하고 극진한 대우를 하였으며, 조선에 내조하였던 명 사신들과 명 내부 문인들의 인식 또한 이전에 비해 긍정적으로 변화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양국의 공통된 서예문화 흐름 또한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위와 같은 국외적 요인들이 효과적인 서예문화 교류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서예문화 교류의 내용을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16세기에 들어서자 국왕과 사림세력은 전대의 폭정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가를 주자의 지치주의 도학정치로써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서적수집'이 그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그로인해 그들은 송명이학 관련 서적을 국내외에서 수집 후 간행하였으며, 송명이학에 대한 연구가 심화됨과 동시에 서적에 담겨있던 미학적인 문장과 서론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송명이학에 근거한 서예사조와 서예관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이 시기의 서예문화 교류는 대부분은 사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명 사신은 조선으로, 조선 사신은 명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 파견된 사신이 타국의 문인들과 어떠한 서예문화 교류를 하였는지 확인하였으며, 그 내용을 인적 교류와 물적 교류로 나누었다. 파견된 사신들은 서예문화와 관련 물품들을 구득하였으며, 외국의 문인들과 필담창화를 하였고, 글을 써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는 서예문화 교류의 효과를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16세기에 이르러 송명이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자, 사상과 불가분 관계인 서예 또한 송명이학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에 따라 당시의 서예문화와 서예관이 송명이학의 바탕 위에서 형성되자, 실질적으로 많은 서예가들이 조맹부체가 아닌 고법의 서예를 구사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서예를 비평하는 방식 또한 송명이학에 근거하게 되었다. 송명이학 서적의 유입은 성리학적 서예미학의 심화로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둘째, 명나라와의 서예문화 교류에 대한 평가들을 분석을 통해 당시 조선의 서예문화가 국제적 보편성과 국가적 개성, 그리고 우수함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 서예문화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 시킨 서예가로는 한호와 이황, 김구와 최전 백진남 등이 있다. 서예물품 또한 품질이 매우 우수하여 명나라 사람들에게 애호의 대상이었음 확인하였다. 대외적으로 인기가 많아, 당시의 조선 서예문화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일조하였다 할 수 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16세기에 이루어졌던 조선과 명나라의 서예문화 교류의 내용과 그 효과가 확인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류와 서예문화의 상호관계를 확인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