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의 대표적인 서체인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등 5체 가운데 해서(楷書)는 가장 완성격의 서체이다. '해(楷)'자는 본보기·모범·법식 등의 의미로 해서는 모범이 되는 서체를 말하며, 정서(正書) 또는 진서(眞書)라고도 일컬어왔다.
예로부터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나 관청에서 통용되는 문서, 또 조선시대 비문(碑文) 대부분이 해서로 쓰여 질 만큼 해서는 예와 격식을 갖춘 정중한 서체이다. 특히 역대 서가들의 학서 과정에서 해서를 익힐 때 가장 공을 들였다는 일화도 여럿 전해질만큼 서예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서체이다. 이를 참작하면 한 시대의 해서풍을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의 서풍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고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200년간의 해서에 관하여 그 풍격을 연구하였다. 한국서예사에 있어서 조선 전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었던 시기는 세종연간과 성종연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시기를 중심으로 당시 고법(古法)을 계승한 해서풍과 조맹부(趙孟頫) 송설체(松雪體)를 수용한 해서로 대별하여 대표적인 서가들과 그들의 작품 및 관련기록을 근거로 조선 전기 해서풍 전반을 조명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체제정비의 필요에 따라 신서체(新書體)의 출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고려의 유풍(遺風)이 전래되어 고려시대에 쓰였던 진(晉)·당(唐)의 고법, 송(宋)의 서법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이후 세종연간에 이르러 나라가 안정되면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집현전 학사와 같은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조맹부의 송설체가 성행하였다. 하지만 성종연간에 사림(士林)들이 정계에 진출함에 따라 이들의 영향력이 서예에도 이르렀다. 그들은 그간 조선에 유행했던 송설체를 성리학적 사유로 비판하며, 고법으로의 복귀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묵수한 것은 아니며, 조선 선비로서의 성정이 담긴 우리 고유의 서풍을 구사하였다.
이를 종합하면 조선 전기의 해서는 진·당의 고법, 송·원의 서법과 같이 다양한 서풍이 혼재하였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로 인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해서에도 다양한 변화의 양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전기 서예의 흐름 속에서 중국 서예와는 구별되는 우리 민족만의 미의식이 해서체에 가미되었고, 이는 후에'석봉체'·'추사체' 등 조선풍을 형성하는 데에도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해서에 대한 연구는 조선 후기 서예의 전개양상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