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무용은 1920년대 중반의 '신무용'을 시작으로 곧 백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총론은 물론이고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작품론이나 작가론 등은 아직 본격 연구가 부족한 상태다. 이것은 한국무용연구의 약점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본 논문은 작가론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무용계의 현실에서 1986년 〈씨알〉을 시작으로 춤 작가적 성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춤에 관한 연구이다.
이에 관한 연구의 이론적 배경으로는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가 제시하는 『수행성의 미학』 (Ästhetik des Performativen)을 기본적 토대로 삼았다. 피셔-리히테가 제시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의 중요 키워드는 '공연(Performance)'이다. 그는 1960년대 이후, 연극을 비롯하여 행위예술까지 그 개념을 확장하여 재조명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가진 가치와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피셔-리히테의 말처럼 수행성의 미학을 '경계의 개념을 문지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을 때, 안은미의 춤은 경계를 넘어서서 문지방의 건너편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경계의 개념이 이것과 저것의 분명한 차이를 표시하는 선(line)이라면 문지방은 저편으로의 자연스러운 초대이다. 경계는 안전하지 않은 곳이며 허가되지 않은 경계 넘기는 위험한 행위이다. 그래서 경계를 넘어서는 것에는 항상 도발과 실험이 동반되며 외부의 적대적 공격 또한 감수해야 한다. 그에 비해 문지방은 다양한 가능성과 실험, 변화 등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이다. 안은미는 그 경계를 문지방으로 바꾸는 독특한 연출전략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이루어낸다.
안은미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다양한 수식어만큼이나 다양한 실험과 도발적 춤을 감행해온 무용가다. 초창기 그의 춤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무용의 엄격한 전통을 고수하는 정형주의(formalism)와 조우하지 못하며 외면 받았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예컨대 전통을 패러디한 춤에서 보여준 과감한 토플리스(topless) 역시 전통과 현대의 불편한 연출이며 혼란스럽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공연작업은 한국현대무용에서 20세기를 마감하는 시기에 나타난 흥미로운 가능성이자 지금도 진행 중인 동시대 춤의 비전 제시라는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다. 지금도 그의 춤은 기존의 무용적 관행과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문제적 춤으로 자신만의 견고한 작가정신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안은미의 춤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춤은 첫째, 예술적 관점에서 비롯된 창의적 측면이 있다. 그의 작업방식은 단순히 동작을 조합하는 안무가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하나를 주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그것을 실험하고 자신만의 미학적 관점을 찾아가는 작가적 성향을 보인다. 안은미의 작품들을 보면 일회성 공연으로 그치는 경우보다 시리즈로 구성된 공연이 많은데, 예를 들어 '무덤 시리즈', '달 시리즈', 'Let's 시리즈', 'Please 시리즈', '커뮤니티 댄스 3부작' 등은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오랜 연구와 깊은 고민이 드러나는 작가정신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춤의 초창기부터 보여준 그의 작가적 성향은 정형주의에 갇힌 한국현대무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는데, 엄숙주의를 거스르는 파격적 누드와 상식을 뒤집는 움직임, 원색적이다 못해 유치찬란한 의상과 생활 속 싸구려 소품들, 클래식이 아닌 대중가요의 접목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안은미의 스타일은 춤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엽기, 유치함, 천박함, 저질, 싸구려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새로운 시도의 실험, 도발,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온 몸을 적시는 붉은 피로 관객을 기절시킨 〈Period 2〉와 처참하게 뭉개진 토마토로 상징되던 여성성의 〈토마토무덤〉, 때밀이 수건 하나로 관객을 사로잡은 〈은하철도 000〉, 당당하게 가슴을 노출하는 〈춘향〉에 이르기까지, 그의 춤은 상식을 거스르고 고정관념을 뒤집는 춤 언어를 보여주었다.
둘째는 안은미의 춤이 현대무용을 친숙한 장르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 대중적 측면이 있다. 안은미의 춤은 지금까지와는 차별화된 독특한 스타일로 객석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新춘향〉과 〈바리〉에서처럼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를 가져오되,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 유쾌함과 경쾌함을 넣어 새로운 스타일의 춤을 선보였다. 〈新춘향〉에서의 주인공 춘향은 10대의 아리따운 소녀도 아니며 무작정 이몽룡을 기다리는 수동적 여성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몽룡을 유혹하고 변학도의 폭정에 맞서 시위를 주동하는 사회운동가다. 〈바리〉에서의 바리 또한 아비를 살리기 위한 희생의 아이콘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소매를 걷어 올린 저고리와 무릎까지 올라온 짧은 치마는 버려짐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내며, 모든 버려지는 것에 대한 위안과 화해의 메시지를 현대적 샤먼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하지만 안은미의 대중적 인지도를 더욱 확고하게 해준 것은 아무래도 일반인들과 함께 한 '커뮤니티 댄스'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들의 아카이빙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커뮤니티 댄스 프로젝트는 이후 고등학생, 아저씨들, 장애인, 그 밖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일반인들이 공연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몸짓으로 보여줬다. 그들의 몸짓은 사회적 배경과 계층을 떠나서 실재하는 삶과 노동의 흔적이 담긴 투박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춤은 어떤 정형화된 춤공연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본 연구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첫째는 한국현대무용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무용가 안은미의 춤을 중심으로 그의 춤에 나타나는 수행적 특성과 안무전략을 살펴보았다.
둘째는 아직 심층적 연구가 부족한 춤 작가란 개념이 어떤 기준에서 새롭게 규정될 수 있는지를 안은미 춤의 창의성과 대중성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안은미의 춤은 초창기부터 열광적인 팬을 끌어 모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극단적인 혹평 속에 미친 짓으로 폄하되거나 지독한 나르시시즘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 춤에 대한 파격적 실험과 도전이 한국현대무용의 표현영역 확장에 기여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그의 춤은 이제 하나의 가치와 철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그 이해가 안은미의 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더 이상 파격이나 도발적 움직임으로 전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의 춤은 항상 예술적 트렌드와 대중의 기호를 서너 걸음 앞에서 리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후 안은미 춤의 흐름이 또 어떻게 변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안은미가 우리에게 보여줄 춤에 대한 즐거운 상상과 기대를 더욱 높여주는 이유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