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계승하면서 그의 삶을 추적하고 시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삶과 시가 어떻게 기억 전승되고 있는지 수집 정리하고 그 현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 명동마을에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이었으나 윤동주는 그의 고뇌를 시로 표현하며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초월하고자 했다.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서도 다양한 시와 산문을 썼으나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현실 앞에 주변인들의 만류로 출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여전히 한글로 시를 쓰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했다. 1943년 여름방학을 맞이해 귀성길을 준비하던 윤동주는 일본 특고 형사에게 '독립운동'의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45년 2월에 해방 6개월을 앞두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이름 모를 주사의 생체 실험을 받고 사망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된 이후, 초기에는 그의 단편적인 시와 죽음을 근거로 하여 그를 좁은 의미의 저항 시인으로만 보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삶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자 그를 저항 시인, 민족 시인, 자기성찰의 시인, 동시 시인, 기독교 시인 혹은 한일간의 화해와 평화의 시인으로 보는 등 다양한 시각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를 부분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그의 삶과 시를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그의 시는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의 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통해 고통을 초월하며 새로운 평화와 생명의 공동체를 열어갈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숭고한 정신이다.
이러한 그의 삶과 시는 다양한 방면에서 기억되고 전승되고 있다. 먼저 영상 매체에서는 초기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죽음의 원인을 근거로 저항 시인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양한 융합 콘텐츠가 생겨나며 그에 맞추어 윤동주도 다양한 장르로 소개되고 있었으나 다큐멘터리와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특성의 한계 때문에 윤동주의 숭고한 정신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이준익 감독이 흑백기법과 플래쉬백의 촬영기법을 활용하여 윤동주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윤동주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콘텐츠로 자리매김되며 음악, 소설, 뮤지컬, 공연, 기념사업회, 상품, 건축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도 윤동주가 기억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이 계승되기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회가 열렸고 그의 시가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윤동주는 그의 시집이 8개 국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그의 삶과 시 세계에는 저항성, 민족 서정성, 자아 성찰성, 동시성, 기독교적 성격과 평화와 화해의 성격이 총망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와 그의 시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기억되고 사랑받는 이유는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계승하려고 하는 대중들의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죽어가는 것들까지도 사랑하면서 그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함으로써 평화와 생명의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보편의 정신이 표상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정신을 콘텐츠의 특성과 제한 속에서도 어떻게 최대한 잘 전달하고 공감하게 할 것인가가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의 숭고함이 담긴 윤동주의 시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면 큰 위로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줄 것이다. 또한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도 윤동주의 삶과 정신은 적지 않은 통찰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