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ruin)'는 단순히 낡거나 파괴된 잔재물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장소로서, 과거와 현재의 역사, 사회, 문화적 현상을 대변하는 유동적인 대상이다. 재난과 폐기가 대량화한 오늘날에는 폐허가 생활의 일부이자 흔적으로서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까지 가리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폐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급증하고 있으며, 이제 한국의 폐허도 역사와 시각문화의 대상으로서 미술사에서 연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폐허 중 한국전쟁 폐허는 가장 대규모로 발생했고 그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므로 한국의 현대 폐허를 논할 때 우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본 논문은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분석된 바 없는 한국전쟁 폐허와 그 표상들을 의미의 층이 중첩된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적·문화적·미술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폐허는 한동안 전쟁의 비극적 결과로서 버려졌다가 다시 그 증거로 채택되었고 점차 한국전쟁에 대한 부정적 상징으로 통용되었다. 그러한 고정된 상징성은 일반화되어 여전히 그 폐허들을 규정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용자에게 개인적 기억과 경험을 일깨우며 끊임없이 의미를 재생산한다. 또한 전쟁으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폐허는 기념비가 되고 문화적 소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수용의 변화에 따라 한국전쟁 폐허는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전쟁 폐허와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코드화되어 집단의 기억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는지 분석하고, 기호학·정신분석학·예술철학의 이론들을 접목한 해석을 통해 새로운 수용의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 대상으로 삼은 폐허는 현존하는 실제 폐허와 폐허의 사진 이미지로, 1. 철원 '노동당사', 2.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3. 맥스 데스퍼(Max Desfor)의 '대동강철교의 피난민' 사진, 4. 성두경(成斗慶) 사진집 「다시 돌아와 본 서울」 등 네 가지로 한정했다. 선정 기준은 지리적 대표성, 현재까지의 인지도 및 활용도, 특히 역사적·문화적·학술적 중요성에 따랐다.
그동안 한국전쟁 폐허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증거로 반공·안보의식을 강화하며 정치적 선전에 활용되었고, 한국전쟁의 아이콘으로서 '집단적 기억'을 형성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폐허는 한편으로 개인적 기억의 공간이며, 존재론적·미적 경험의 대상이기도 하다. 폐허는 시간의 흔적이요 기억의 단편으로서 다층적 팔림프세스트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단일하고 고정된 '상징'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알레고리'로서 작용한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잔해들은 상실에 대한 고통과 공포를 되살리는 트라우마의 대상이다. 그것은 전쟁의 체험자나 직·간접적 목격자들에게 트라우마라는 일차적 기억에 직면하도록 함으로써 잃어버린 과거의 진실로 유도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 폐허는 전쟁 사건에 의한 '역사적 트라우마'뿐 아니라 주체의 근원적인 '구조적 트라우마'를 인식시킨다. 즉 한국전쟁 폐허는 근대적 성취와 열망에 내재한 불안의 징후로서 발전과 몰락이라는 근대의 두 얼굴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나아가 모든 존재의 불가피한 궁극적 소멸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 폐허는 멜랑콜리와 언캐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애도를 통한 고통의 극복을 유도하기도 한다.
사진으로 재현된 폐허는 현존하는 잔해와 달리 관람자를 당시 파괴의 현장으로 직접 데려간다. 사진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물리적으로 고정시킨 것으로, 부재하는 것의 기록이자 증거로 활용된다. 그러나 사진은 한편으로 매체와 조형적 처리에 의해 '거리두기'가 이루어져 두려운 대상을 완화시켜 경험하게 한다. 예컨대 성두경의 사진에서 '거리두기'는 작가가 끔찍한 현장을 다루고 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어 근대적 작가-주체의 시각을 드러낸다. 포스트모던한 관점에서 재조명하자면, 이러한 '거리두기'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일종의 베일을 드리우는 것인데, 그 베일은 수용자인 개별 주체들의 상이한 기억을 건드려 전쟁의 리얼리티가 파열하게 하는 이미지-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이제 한국전쟁 폐허는 '역사적 기념비'이자 '반기념비'로서 기념비성의 역설을 내포하며 현시대의 '문화적 기억'의 장소가 되고 있다. 또 오늘날 그 폐허는 관광, 홍보, 광고에 활용되어 상품화하고, 기억 자체도 소비의 대상이 됨을 드러낸다. 대중매체와 소비의 시대에 폐허는 더 이상 낡거나 파괴된 것에 국한되지 않고 모조, 복제, 재생되기도 한다. 한국전쟁 폐허와 그 이미지는 현존하는 기억의 흔적으로서 역사적 장소일 뿐 아니라, 유동적 단편으로서 현대의 문화현상과 주체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