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쉬빙(徐冰)의 문자 작업을 문화와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고찰한 것이다. 중국 사회에서 문화는 연속적인 혁명의 물결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화두였으며, 마오의 사망 이후에는 그 토대부터 근본적으로 점검된 개념이었다. 전형적인 식자층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문화혁명기와 문화열, 그리고 미국으로의 이주라는 역사적 분기점들을 거치면서, 문화를 곧 언어라는 상징체계와 동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문자는 혁명기 동안 쉬빙이 숙명적으로 관계 맺어야 했던 언어 체계로서, 그의 작업이 판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주요 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쉬빙은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했던 '문화'라는 포괄적인 주제를 다름 아닌 '문자'를 통해 사유하고 가시화하였다.
본 논문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한 것은 그의 작업에 제시되고 있는 문화와 문자의 관계가 단선적 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혁명기, 사상적 계도라는 명분하에 시행된 언어 통제나 지식층에 가해진 박해, 그리고 이주 후 낯선 문화적 환경에의 노출 등은 그로 하여금 양자 사이에 권력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이에 본 논문은 그의 작업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화와 문자의 관계를 권력의 문제에 연계시켜 해석해 보았다. 또한 본문을 구성함에 있어서는, 쉬빙이 문화와 문자 사이의 역학을 비평할 뿐만 아니라, 그에 실천적 개입을 시도하였다는 점을 도출하고자, 상징적인 작업에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표출한 작업으로 전개되도록 기술하였다.
먼저 본 논문은 문화 구성 요소인 문자를 '문자언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상정하여 다룬 작품들을 분석하였다. 쉬빙은 '살아 있는 글자'라는 다소 이상적 형태의 문자를 구현함으로써, 문화를 역동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선행 조건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작업에 등장하는 텍스트, 서사, 책 등의 인쇄된 문자들을 문화 재생산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활자 공간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텍스트의 구조를 해제함으로써, 문화 변동과 재구성의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질적 체계의 문자들을 충돌시킨 작업들을 통해, 문화에 관여된 힘의 구조들이 구체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가시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중국과 서구 양자로부터 축출되는 과정을 경험한 그는 혼합 문자를 고안함으로써, 언어, 정체성, 민족국가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본 논문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 쉬빙 작업의 궁극적 목표가 문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의 작업은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의 통로는 아니지만,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저항의 계기들을 들춰낸다는 점에서 문화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또한 매체적 측면에서, 미술에서의 변화된 문자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는 점, 그리고 주제적 측면에서, 미술과 문화의 밀착된 관계를 재확인시킨다는 점을 쉬빙 작업의 미술사적 의의로 도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