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三國史記』초기기록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百濟溫祚王代의 영역확장 과정과 그 결과 형성된 복속관계의 실제내용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검토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溫祚集團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百濟를 건국하기 이전, 한반도 중남부의 先住勢力은 馬韓이었다. 마한은 그 규모에 따라 小國과 大國으로 구별되는 54개의 ‘국’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대국을 중심으로 소국공동체 상태의 소국들이 복속된 세력권이 권역별로 형성되어 있었다. 『三國史記』百濟本紀에 기록된 馬韓王은 古朝鮮準王계의 韓王으로, 辰國을 다스리며 아산만 일대와 한강 유역에 걸쳐 세력권을 형성하였으나, 『三國志』가 편찬되던 시기에는 이미 백제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존재로 기록되었다.
온조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한왕이 다스리는 진국(‘마한’의 國邑)을 병합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高句麗건국세력으로서 온조집단이 보유한 국가형성의 경험과, 기마전술과 철제무기와 같은 우세한 군사력을 들 수 있다.
처음 河北慰禮城에 자리잡은 백제는 靺鞨의 침입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樂浪과의 우호관계를 잃었으며, 이것이 백제가 ‘마한’에 대해 복속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백제는 한왕의 용인 아래 河南慰禮城(=漢城)으로 천도하였는데, 자연방어선인 한강의 확보는 그동안 외부 세력과의 교전에 집중되었던 국력을 내적 안정으로 분산시킬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주변의 소국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彌鄒忽의 沸流集團은 복속된 이후 백제의 지배세력에 편입되었으며, 백제본기 편년기사의 解氏세력이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추홀은 기존에 인천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건국설화의 내용과 복속 당시의 정황을 분석하면 오히려 파주·적성 일대를 그 위치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비류집단의 복속시기는 파주 지역에서 백제가 對말갈방어전을 수행하였던 온조왕 18년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류집단의 복속 이후 백제는 국가제사를 거행하는 등의 지배체제 정비작업을 수행하였다. ‘十濟’에서 ‘백제’로의 국호변경은 이 시기 지배체제를 안정시킨 온조집단이 자신감을 드러낸 결과일 수 있었다.
비류집단 복속 이후, 점차 주변의 소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나가던 백제는 기만책을 구사하여 진국(‘마한’의 국읍)을 병합할 수 있었다. ‘마한’중심세력 내부의 동요 또한 백제가 수월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제의 ‘마한’정복은 백제왕이 한왕을 대신하여 ‘마한’사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할 뿐, 마한 전역에 대한 영역적 지배를 관철시킨 것은 아니었다.
‘마한’멸망 이후, 백제는 전쟁을 통해 복속된 지역에 대해서는 축성과 사민을 통한 실질적인 통제를 시행하였다. 반면에 자발적으로 백제에 복속된 소국들에 대해서는 공동체적 관계가 온존된 가운데 자치권이 허용되는 간접적인 통제가 행해졌다. 백제와 복속된 소국들과의 관계는 군사적 보호와 貢納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백제는 저항하는 소국세력에 대해서는 군사적 제재를 가하였으며, 인민관리의 기능을 수행하는 巡撫를 실시하여 복속된 소국세력이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백제가 경기전역과 충남북부 일대를 세력권으로 확보한 이후에도, 마한을 칭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차령산맥 이남에서 目支國의 辰王을 중심으로 별도의 세력권을 형성하며 백제와 대립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이 3세기 중엽까지 이어져 삼국지 魏書東夷傳韓條에 백제와 목지국의 존재가 나란히 기재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