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天下觀에 대한 연구가 4~5세기에 주로 집중된 결과, 이 시기가 독자적인 천하관이 처음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고, 오랜 발전과정을 통해 전성기의 국력과 대외 관계를 바탕으로 생겨날 수 있었던 관념처럼 인식되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을 문제의식으로 삼았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단순히 관념 자체가 오래 기간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그 관념을 뒷받침하는 현실의 지배구조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4~5세기에 확인되는 천하관의 역사적 배경을 고구려 초기부터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고조선 당대의 인식을 내포하고 있는 단군신화에는 天孫族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고조선의 자존의식은 국가체제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다. 고조선은 기본적으로 중심국인 '朝鮮'이 주변의 복속된 세력들을 느슨하게 아우르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조선은 중앙정부적 지배구조를 내포하고 있었고, 후기의 지방편제방식은 '朝鮮貢蕃'이나 '朝鮮藩屛'에서 보이듯이 '중심국가' 의식을 바탕으로 貢納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의 國都 역시 고조선의 '조선' 경우처럼 '부여'로 불린 '濊城'으로, 예성의 주변 지역들은 고조선처럼 半독립적인 상태의 小國들이 존재해 누층적인 국가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부여는 강력한 王權과 제가세력이 권력을 두고 미묘한 균형을 이룬 형국이었다고 추정된다.
서기전 2세기 중엽 졸본 지역에는 중국 사서에 '族'이라고 적은 '那'라는 小國 단위의 정치체가 출현했고, 현도군 축출을 전후해 '연나'(연노, 소노) 세력이 서기전 2세기 경 (원)고구려의 지배세력으로 국가형태를 갖추고 졸본의 다른 세력들을 규합해 聯盟을 결성했다. 원고구려의 지배구조는 맹주국이 여러 群小勢力들과 느슨하게 연합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이어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에서 南下한 유이민세력이었던 주몽 집단의 桂婁部는 당시 쇠락한 송양집단(연나)을 접수하고 송양의 근거지인 沸流國을 '多勿都'로 편제했는데, 이는 송양에게 원래 땅을 되돌려주고 대신 계루부 왕권에 복속하는 半독립적인 세력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주몽이 고구려의 왕실교체를 이룬 이후 첫 번째로 시행한 편제정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구려의 새로운 왕실세력이 된 桂婁部는 국내성 천도를 계기로 기존의 '나' 세력을 五部로 편제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고구려는 여러 小國들을 정복해 다양한 방법으로 편제를 했는데 그 대표적인 형태가 『三國史記』에 나오는 '城邑'과 '郡縣'으로, 이들은 일반적으로 고구려와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던 半獨立的 복속세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제사체계에서도 고구려는 大王과 大加들의 차별성을 바탕으로 중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세칭 '제가회의'라 일컬어지는 행사도 기실 中國의 天子-諸侯 관계를 연상하게 하는 會盟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왕의 순수의 대상지는 다름 아닌 일찍이 복속시킨 자치세력들의 근거지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지』 고구려전의 관등을 분석한 결과, 고구려 초기국가의 지배구조는 계루부 왕권을 頂點으로 하여 기본적으로 半자치적인 大加들이 국왕 밑에 결집한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4세기 이후에도 고구려의 일부 관등에는 여전히 4세기 이전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결국 고구려 中期에 접어들어서도 일부 관등과 관직은 단지 이러한 전통적 지배방식을 합리화시켜주는 公的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미천왕대에 고구려는 낙랑·대방지역을 점령한 다음 中國的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던 이 지역이 동시에 百濟와의 접경지대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고도의 통치술을 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國初 이래 하나의 전통이던 고유의 半自治的 복속방식을 중국식 郡縣制와 결합해 새로운 지배방식을 창출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幕府制'를 2군 지역의 통치방식에 적극적으로 도입했음은 막부제가 기존 고구려 지배체제에 융화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王은 사실상 '大王'적인 위치에 있었다. 고구려 中期에 접어들어서는 '太王'이라는 용어가 보이는데, 아마도 미천왕 때 처음 생겨서 고구려 말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太王'으로의 칭호 格上은 고구려 영토팽창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그은 美川王代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능비 등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5세기 대외정책의 골자는 크게 '屬民'과 '異種族'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속민'에 해당하는 백제, 신라, 동부여 등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와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천하관의 적용양상은 세부적으로 많이 달랐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고구려에 朝貢을 바치는 屬國들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인 北燕 역시 고구려의 세계질서 아래의 속국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5세기 이전 고구려인의 의식의 연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구려는 중국의 왕조들을 대할 때 능비에 나타난 주변세력들에 대한 인식과 큰 차이점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異種族들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實利의 대상이 되었다. 고구려의 이들 세력에 대한 복속의 의지나 강도는 일정한 동질성을 가지는 다른 세력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일단 屬國으로 만든 다음에는 그들이 고구려의 세력권, 즉 天下에 소속되었음을 闡明했는데, 이것이 '屬國'과 '附庸'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5세기 고구려 金石文에 나타나는 천하관의 내용은 크게 신성관념, 복속관념,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 등으로 大別할 수 있다. '신성관념'은 역대 고구려왕이 모두 단순히 하늘의 代理者가 아닌 하늘 그 자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천손의식'과 '화이관'으로 표출되었다. '복속관념'은 '守天', '奴客', '朝貢' 등의 개념들이 있는데, 모두 그 유래를 고구려 전기 지배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는 당대의 '皇天', '四海', '天下', '四方' 등이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로 '지상의 모든 공간'을 뜻한다.
이렇듯 능비의 천하관의 골격은 이미 고구려 초기부터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과정에서 주변 小國이나 종족들을 복속시켜 우두머리를 온존시키거나 국왕과 가까운 자에게 위임하는 범주가 '半독립적 복속세력'들이었고, 이런 형태의 지방세력들이 다수 존재하는 지배구조가 나중에 오랫동안 고구려 國王을 황제와 같은 위상으로 여러 半독립적 세력을 거느린 것처럼 스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집권화의 추세에도 불구하고 4세기 이후 다양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 오랜 축적된 경험이 기초가 되어 5세기 중국의 황제적 위상에 도달한 '王客秩序'로 나타났다. 이상의 내용들이 곧 5세기 고구려 金石文에 보이는 천하관의 주요 형성배경이었던 것이다.